“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노라 / 떠나 버리자. 저 멀리 떠나버리자… ”<말라르메, ‘바다의 미풍’ 중에서>
시인은 이상의 절대 공간을 향한 폭풍과 바람. 난파의 공포를 불안해하면서 닫힌 세계의 행복으로부터 떠나야 할 것들을 열거한다. 육체, 해묵은 정원, 모든 책, 백지 위의 불빛, 가정…
누구나 마음속에 모든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의 방을 꿈꾼다. 막연히 혹은 열렬히 동의하기에 구축한 자신의 삶의 굴레를 활짝 열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모든 것이 가능한 내적 공간으로의 출구는, 출구는 사실상 없다는 것, 바로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리라는 것을 자명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동경의 장소, 휴식과 도피의 장소, 때로는 절대 이상의 신성한 하나의 상징적인 방이 존재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바다 옆의 방’<사진>의 그림은 그러한 방의 내부를 세밀히 보여준다. 빛이 환하고 공기가 청명하고 시원한 바다 내음이 나는 듯한 방의 발코니에 이미 들어가 서 있는 듯하다.
그는 햇살이 벽에 환히 부딪히는 방의 내부를 즐겨 그렸는데 그가 그린 창이 있는 방의 그림들 중에는 햇살을 받으며 긴 그림자가 그려진 전라의 여인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햇살을 받은 여인’),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보는 긴 머리의 누드의 여인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저녁바람’), 누드의 여인 곁에 앉아 책을 읽은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철학의 탐구’).
방에 비치는 빛의 묘사와 함께 심리적인 뉘앙스가 느껴져 그 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그 방에 있을 수 있는 인간들 사이의 심리적이고 현학적인 단 하나의 장면이 마치 미스터리 영화를 보듯 심미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방은 잡지의 선전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속적인 방이 아니고 유혹자의 은밀한 방도 아니다.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표현했다는 미술 비평가들의 평을 극히 싫어했다는 그가 그린 방은 고요하고 빛이 밝고 열려있는 영원히 아름다운 어떤 장소, 지고하고 신성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회향의 절대 공간이다. 가장 탁월한 색채의 화가인 피에르 보나르도 그러한 방을 일생 그렸는데 그는 연인이 목욕하는 욕조의 장면을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색조로 그렸다. 마치 햇살이나 별빛 속으로 초대하는 듯하다.
실제적으로는 흰 벽의 소박한 작은 욕실의 구조에서 살았는데 그가 끝없이 그리고 또 그린 목욕하는 연인의 그림은 그림의 역사상 가장 찬란히 아름다운 방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도 언뜻 그토록 고요하고 빛 밝은 방에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 데 늘 지나치던 책과 책상, 벽과 창의 모든 사물들이 조용히 빛나고 있는 듯하여 놀란 시선으로 방의 구조를 바라볼 때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바닷가의 아름다운 방은 베니스의 어느 방이다. 정오의 햇살이 가득 비치고 있었고 넓은 창으로 바다가 보였다. 방의 벽에는 알랭 레네의 ‘전쟁은 끝났다(La guerre est finie)’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포스터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연인을 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철학과 영화를 전공하고 있던 그 방의 주인은 ‘보는 것’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한 남자가 바닷가 아파트 방의 벽을 허물고 살기 시작하자 다른 방의 주인들도 벽을 허물고 살기 시작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얘기하고 있었다.
말년의 에드워드 호퍼는 아내와 함께 늘 연극관람을 즐겨했다고 하는 데 그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사실적인 한 장소에 있으나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는 듯, 삶이라는 연극의 한 장면에 잠시 출연하고 있으나 본래는 다른 곳에서 온 듯한, 내면적 무관심의 심리를 보여준다. 적막감이 도는 개스 스테이션에서 저녁 어스름 빛에 개스를 넣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그려 미국인의 공허한 일상을 보여준 그의 초기 작품에 비해 말년의 화가는 빛이 가득한, 눈부시도록 흰 빛이 가득한 빈 방의 고요함과 무한히 열린 정신의 내면 공간을 그렸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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