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미국사회는 지구상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워런 버핏의 부자 증세 주장으로 시끄러웠다. 버핏이 부자들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 오랫동안 목소리를 높여온 것은 새롭지 않다. 그런데도 버핏의 발언과 주장이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미국의 위기와 이것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위기의식과 무관치 않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념의 틀에 갇힌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특히 공화당의 막가파식 이념주의자들인 티파티는 자신들의 부유한 지지자들에 대한 세금을 늘리느니 미국경제를 파탄 내는 일을 택하겠다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이들에게는 타협의 여지가 좁쌀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버핏이 던진 화두는 졸고 있던 미국인들의 문제의식을 깨우쳐 주는 죽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동안 부자 감세의 폐해에 대한 논쟁은 지속돼 왔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고 있는 유권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버핏이 자신의 주장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하고 의회에 부자 증세를 촉구하고 나서면서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미국인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버핏 뿐 아니라 ‘재정 건전성을 바라는 애국적 백만장자들’ 같은 단체에 소속된 수퍼 부자들이 그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분위기 확산에 한 몫 하고 있다.
버핏의 호소가 정치현실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자 감세로 누구보다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그가 내세우고 있는 증세 주장이기 때문에 어떤 증세론 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 혹은 진보적인 민주당이 부자들의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면 그 정당성과 관계없이 계급적인 주장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서로 다른 입장이 팽팽하게 맞설 때 그러한 균형을 깨뜨려 주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상대의 입장에 서는 소수의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가령 사형제도의 경우 폐지를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설득력을 더 해 주는 것은 종교인이나 인권단체들이 아니다. 극악 범죄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벌이는 사형제 폐지운동이야말로 어떠한 폐지논리보다도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민감한 사회적 이슈들은 대개 찬반 논리가 너무나 뚜렷해 서로 간에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극적으로 변화를 가져다주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은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뛰어 넘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부자 증세가 새삼스레 이슈화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돈 많은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내겠다며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의 발전과 진보는 이처럼 이념의 진영, 이해관계의 진영에 갇히지 않은 채 과감히 이를 떨치고 나온 인물들에 의해 이뤄진 경우가 많다. 리처드 닉슨이 대표적이다. 닉슨은 지독한 반공주의자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빨갱이를 때려잡자’며 미국을 휩쓸었던 극우 광풍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로 흔히 매카시가 거론되지만 실질적으로 색깔론을 주도한 사람은 닉슨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산국가인 중국과의 역사적인 수교를 이끌어 낸 것은 공산주의를 혐오한 닉슨이었다. 그가 추진한 미중 수교였기에 실현이 가능했다. 만약 민주당 정권이나 진보적 대통령이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했다면 비난 공세에 지레 꺾이고 말았을 것이다.
중동평화 협상을 성사시킨 이스라엘 지도자도 매파의 선두인 베긴이었다. 테러리스트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팔레스타인에 적대적이었던 그가 결단을 내림으로써 역사적인 협상이 도출될 수 있었다. 비둘기파의 누구도 엄두내지 못한 일을 해 낸 것이다.
닉슨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면 미국은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 계층 간 격차가 급속히 줄었고 사회보장은 가장 큰 폭으로 확대됐다. 지금의 공화당과는 완연히 다른 보수였다. 진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요즘의 보수주의자들은 대선배인 닉슨에게서 한참 배워야 한다.
이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평면적 사고에 머문다. 그러나 역사는 이에 갇히지 않고 입체적 사고를 하는 인물들에 의해 조금씩 진전돼 왔다. 미국이 처해 있는 현실은 더 이상 이런 인물들을 찾아보기 힘들어 진데서 비롯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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