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괜히 시카고 컵스를 싫어했던 때가 있었다. 80년대 말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TV에서 거의 매일 시카고 컵스의 경기를 중계해주는 채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시카고 방송사인 WGN이었다. 그 채널을 통해 컵스 경기를 자주 봤는데 어느덧 나도 모르게 컵스의 ‘안티 팬(anti fan- 반감을 지닌 팬)’이 돼 있었다.
그 이유는 흥분하면 ‘홀리 카우(Holy Cow)’를 외쳐대고 선수들의 이름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멋대로’ 불렀던 독특한 스타일의 아나운서 해리 캐리 때문이었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추대된 명 아나운서였지만 대낮부터 얼큰하게 한 잔 걸치고(?) 나온 것 같은 목소리로 대놓고 컵스를 일방 두둔하며 상대팀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는 중계를 하는 것이 얄밉게 느껴져 언제부턴가 컵스가 지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저 컵스가 지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전혀 컵스팬이 아니면서 컵스 경기는 참 열심히도 봤다. 하지만 90년대 말 캐리가 세상을 떠난 뒤엔 컵스가 경기에 이기든 지든 관심이 사라졌다. 그냥 ‘다른 동네 팀’ 중 하나가 됐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인기있는 팀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면 십중팔구 뉴욕 양키스가 1위로 나온다.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든 지역을 망라하는 보편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한다면 양키스가 1위를 차지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사실이다.
그런데 거꾸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팀을 조사해도 양키스는 항상 1위다. 오히려 양키스를 좋아하는 팬 비율보다 싫어하는 팬 비율이 더 높을 것이다. 팬도 가장 많지만 안티 팬도 가장 많은 팀이 양키스다.
다른 종목도 비슷하다. NFL의 달라스 카우보이스와 NBA의 LA 레이커스 역시 가장 인기있는 팀이면서, 한편으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팀이다. 양키스나 카우보이스, 레이커스가 어디를 가든지 만원관중과 높은 시청률을 몰고 다니는 것은 그들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인기 없는 팀은 사랑도 받지 못하지만 미움도 거의 받지 않는다. 즉 안티 팬이 적으면 비인기팀, 많으면 인기팀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경우에 따라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타난다.
지난 주말 막을 내린 PGA챔피언십은 막판 대추격전으로 극적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승부가 결정된 열전이었다. 하지만 정작 TV 시청률을 지난해 대회보다 14%나 추락했다. 이유는 그 곳에 타이거 우즈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즈는 첫 이틀간 10오버파를 친 뒤 일찌감치 보따리를 쌌고 우즈가 떠나가자 수많은 시청자들도 그와 함께 TV 앞에서 떠나갔다.
우즈가 골프중계 시청률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우즈가 우승권에 들어간 대회는 대부분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리지만 그가 불참했거나 우승권에서 밀려난 대회는 예외없이 시청률이 바닥권을 헤맨다.
이는 과거 그의 전성기 때 시작됐지만 2년 전 성추문이 터져 그가 급전 추락한 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성 추문 후 그의 인기도는 폭락했고 그를 싫어하는 바람도 크게 늘었지만 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과 골프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우즈의 경기가 화면에 나오면 아직도 리모트를 내려놓고 지켜본다.
그런 우즈가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PGA투어 플레이오프 페덱스컵에 나오지 않는다. 안 나오는게 아니라 못 나온다. 올해 부상으로 장기간 결장한데다 성적도 좋지못해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우즈로서는 매우 뼈아픈 상황. 하지만 진짜 뼈아픈 쪽은 우즈보다 PGA투어다.
투어의 가장 큰 잔치에 간판스타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큰 잔치라고 선전해도 타이거 우즈가 없는 플레이오프는 ‘앙꼬 없는 찐빵’ 같아서 뭔가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마디로 시작도 하기 전에 김이 샌 느낌이다.
더구나 우즈는 몇 차례 시도에서 뚜렷한 재기의 조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그를 대체할 뚜렷한 인물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즈의 전성기시절 함께 절정의 세월을 보냈던 PGA투어로선 남모르는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