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교수는
1969년 월간문학에 ‘불면’이 당선돼 등단한 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다’‘오라 거짓 사랑아’‘나는 문이다’‘찔레’‘아우내의 새’‘남자를 위하여’‘다산의 처녀’ 등 40여권의 시집과 저서를 내며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시인으로 자리 잡아 왔다.
미국에서 영역시집 ‘할미꽃’(Windflower)과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Woman on the Terrace)가 출판됐고, 다수의 시집이 독일어, 프랑스어, 스패니시, 스웨덴어, 알바니아어 등으로 번역 출판됐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 스웨덴이 동아시아 시인에게 수여하는 ‘시카다’(Cikada) 상을 수상했다. 서울여대, 동국대, 고려대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으며 2년 전 은퇴, 지금은 시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끝없는 실패 실망 절망, 미완성 향한 도전
삶의 본질 투시하는 고통의 모습 녹여내야
여고시절의 유명세 지우는데 10년 걸려
문정희 시인은 몇몇 인터뷰 기사에서 느껴졌던 ‘화려한 여류시인’의 선입견과 달리 진지하고 겸손했으며 아름다웠다. 여고시절부터 ‘한국의 사강’으로 불렸고, 40여년 한국시단에서 스타시인으로, 사랑의 시인으로, 불꽃같은 페미니스트로 명성을 이어오면서 시집을 낼 때마다 전성기를 맞이하는 그녀는 세월이 갈수록 더 화려하고 우아하게 피어나는 글라디올러스를 떠올리게 했다.
올해로 64세. 어떤 이들은 할머니 소리 내며 퍼지는 나이에 그는 아주 스타일리시하게 자신을 꾸미고 젊은 영혼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나이 들수록 예쁘기 위해 애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나이에도 여성으로서 매력을 잃지 않는 시인을 보자마자 나는 대번에 좋아졌다.
그러나 그녀에게 진정 매혹됐던 것은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더 진지하게 고백하는 시인의 삶,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는 “운명을 걸고 시를 쓴다”고 했다. “책상이 우주”라 했고, “내안에 끝없는 실패 실망 절망 미완성이 들어 있다”면서 “끝없이 고봉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다. 내일(6일) 국제펜클럽미주연합회(회장 김문희) 주최의 제24회 해변문학제 초청강사로 온 문정희 시인을 인터뷰했다.
- 미국 방문이 처음은 아니지요?
▲ 아주 자주 왔습니다. 수많은 개인여행은 접어놓더라도 80년대에 NYU 대학원을 다녔고, 96년 아이오와 대학에서 IWP 국제창작 프로그램을 수료했어요. 뉴욕 작가촌 아트 오마이 입소하기도 했고, UC버클리에서 2006년 열린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포럼과 2010년 한국여성시 초대 시낭송회에도 참석했습니다. 나의 영역시집 출판기념회도 여기서 열었으니까 미국은 전혀 낯선 곳이 아니죠.
- 미주한인 시인들과 작품을 많이 접했겠군요.
▲ 작품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갈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포 대상 강연도 많이 했구요.
- 어떤 갈증인가요?
▲ 문학 소재는 미국에서의 삶인데 언어는 한국말을 쓰니까 소재와 표현 도구가 상충되는 모순, 언어 용량의 문제인 것이죠.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센치하거나 신세타령조의 아마추어 적인 시가 많이 보입니다. 좀 더 치열해질 필요가 있어요. 시를 하겠다고 하면 운명을 걸어야 합니다. 삶 따로 문학 따로가 아닌 정말 시인이 돼야 해요.
-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그래요. 한국서도 절절한 문제입니다. 초물량가치, 초스피디 사회에서 문학 찾기는 너무나 힘든 문제죠. 특히 미국서는 더 고통스럽고 어려울 텐데 그런 가운데서도 모국어로 삶의 본질을 투시해 보겠다고 고통하는 모습이 이민문학의 좋은 점이라고 봅니다.
- 해변문학제에서는 어떤 내용을 강의합니까?
▲ 언어와 존재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언어로서 존재한다’는 철학적 명제도 있지만,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언어만큼 존재합니다. 언어용량이 작으면 삶이 옹색하고 피폐하지요. 한국서도 요즘은 언어 사용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사유어보다 일상어만 많이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삶을 바라보자는 것이죠.
- 문학은 아날로그인데 디지털 시대에 시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 외형적으론 오히려 디지털 시대의 덕을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나의 시는 꾸준히 호응도가 높은 편인데 그것은 디지털 전파력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기 때문이죠. 미국에서도 ‘미국인이 사랑하는 시’ 리스트를 인터넷에 입력해 놓고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고 있다는데, 그런 점에서는 앞으로도 충분히 좋을 것 같습니다.
- 부정적인 면은 없습니까?
▲ 50년 전 유명한 작가가 ‘문학이 뉴스로 소비될 위험이 크다’고 예언한 적이 있어요. 문학을 인스턴트 음식처럼 쉽게 받아들이고 던져 버린다는 뜻이죠. 인간은 배부르면 더 좋은 것을 찾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보니 본질적인 것을 찾지 않아요.
- 여고시절부터 스타시인이었는데 오랜 세월 어떻게 시심을 유지해 왔는지요.
▲ 진명여고 1학년 때 전국 고교백일장에서 입상한 이후로 20번쯤 각종 대학 백일장에서 장원도 하고 문학상도 타고 시집도 냈어요.
저를 적극적으로 치켜세워 주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 문하로 동국대에 특례 입학했지요. 그게 굉장한 건 줄 알았는데 문학은 콘테스트가 아니더라구요. 그 걸 덮는데 10년 걸렸습니다. 여류시인으로 얼마든지 유명하게 지낼 수 있지만 내용은 공소하지요. 매스미디어적 이름은 굴러다닐 뿐이에요.
- 어떻게 덮었습니까?
▲ 다시 공부하자고 책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주 얘기하지만 내겐 ‘책상이 우주’입니다. 늘 책상에 앉아 있어요. 어떤 남자가 날 안아주는 것보다 의자를 사랑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읽고 쓴다는 거죠. 문학은 읽고 쓰는 것이니까요.
-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시는 완성이 없습니다. 미완성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미완성의 시를 남길 뿐이지만 진정한 평가는 후대에 시간이 결정합니다.
지금 책이 많이 팔리거나 좋은 평을 받는다고 좋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내 안에는 끝없는 실패 실망 절망 미완성이 들어 있습니다. 알피니스트와 예술가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알피니스트는 최고봉 정상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지만 예술가는 최고봉을 정복하면 더 높은 고봉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쁨이에요. 자꾸 정상에 오르는 기쁨, 그것을 체화하지 않으면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 현대인에게 시란 무엇일까요?
▲ 우물 같은 것입니다. 아껴둔 우물에서 바가지로 떠먹는 물입니다. 콜라, 커피 같은 음료가 많아도 어딘가 숨어 있는 우물이죠.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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