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게임(Chicken Game)’은 195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무모한 자동차 게임이었다. 한 밤중 도로의 양쪽에서 두 대의 자동차가 마주보고 달리다가 충돌이 두려워 먼저 핸들을 꺾어 피한 쪽이 지면서 겁쟁이 ‘치킨’으로 몰리는 경기다. 겁쟁이가 되기 싫어 어느 한 쪽도 핸들을 꺾지 않는다면? 자동차는 충돌하고 ‘승자가 된’ 양쪽 운전자는 모두 죽거나 다치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지난 몇 달 국가 디폴트를 향해 돌진한 워싱턴 치킨게임의 승자는 누가 뭐래도 일단 ‘티파티’다. 단기적인 승부는 그렇다. 장기적 승패는 내년 선거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티파티의 실체가 분노한 진보진영이 퍼부은 것처럼 국가위기를 볼모로 삼은 “테러리스트”인지, 보수진영의 찬사처럼 “역사를 바꾼 영웅들”인지는 앞으로 17개월의 상황진전에 따라 2012년 11월 유권자가 결론지어 줄 것이다.
부채상한을 2조 달러 증액하면서 지출도 비슷한 규모로 삭감하는 부채타협안이, 몇 달을 끌어온 우여곡절과는 대조적으로 이틀 만에 번개처럼 법제화에 성공했지만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다. ‘굴복한 대통령’이란 오명을 쓴 오바마와 “공화당이 원하는 것을 다 내주진 않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못 챙긴”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티파티 공화당조차도 불만에 찬 표정이 역력하다. 지출삭감의 규모가 적자를 해소하기엔 너무 부족하고 자신들이 절대 반대하는 세금인상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투덜투덜 부어있다.
티파티는 표밭에서도, 의회에서도 극히 소수다. 유권자의 11%이며 435명 연방하원의원 중 60명에 불과하다. 워싱턴포스트의 지적처럼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결단력과 신념이 강한” 과격하고 시끄러운 집단이며 타협보다는 파괴를 마다않고 충돌을 택하는 위험한 무리다. 그러나 지난 2년 그들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
민주당 대통령과 공화당 하원의장이 밀고 당긴 끝에 마련한 합의안을 단숨에 결렬시키고 증세 없이 지출삭감만으로, 거기에 헌법수정안 표결까지 포함한 보수적 최종타협안을 끌어낸 티파티의 영향력은 이제 과소평가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들이 이번 부채협상을 통해 거둔 승리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상당히 중요하다고 줄리언 젤리저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적한다. “여론의 관심을 다른 모든 이슈에 우선해 적자감축에 고정시켰고 그 쟁점을 우파 쪽으로 밀어붙였다”
워싱턴 예산논쟁의 쟁점을 지금까지의 “얼마나 더 지출할 것인가”에서 “얼마나 더 깎을 것인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지출 삭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할 것인가로, 세금인상은 얼마나 올릴 것인가 아니라 인상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바꾸면서 보수 대 진보가 아닌, 보수 대 중도의 대결로 변화시키며 진보의 보이스를 약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진보의 큰 정부에 맞서 작은 정부를 추구해온 보수신념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닌 “정부가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 가”로 쟁점을 돌린 덕분에 정부의 규모와 역할에 대한 논쟁에서 보수가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승리의 수명은 보통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의회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젤리저교수는 경고한다. 티파티가 이번 승리를 끌어낸 약속들이 조만간 약점이 되어 티파티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볼모로 삼아 목적달성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는 ‘협박정치’를 워싱턴에 정착시킨 ‘이미지’ 문제만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번 타협안이 미칠 경제적 영향이다. 지출삭감만으로 이루어진 이번 타협안이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실업률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공화당 보수진영은 그럴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많은 경제 관계자들은 그 반대를 예상한다. 가뜩이나 병든 경제가 공무원 감원과 자금경색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동안 보수진영은 오바마의 경기부양안 실패로 경제가 더욱 나빠졌다고 비판해 왔다. 경제가 좋아지지 않으면 이번엔 그들이 내놓은 지출삭감안이 고실업률과 경기 둔화를 부추긴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아직 티파티에는 정비된 조직도 유능한 로비스트도 없다. 언론의 쏟아지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건재하는 그들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론의 지지다. 티파티의 경우, 어려운 경제 속 무능한 정부에 분노한 민심의 물결에서 출발한 힘이어서 더욱 강했다. 그러나 이젠 티파티도 워싱턴의 정치조직으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그리고 이번 타협안은 조직으로서의 그들이 제시한 첫 정책이다.
타협안의 시행으로 경제가 더욱 나빠진다면 유권자들은 티파티에게도 등을 돌릴 것이다. 오바마의 정치생명만 경제상황에 달린 것이 아니다. 티파티도 마찬가지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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