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를 정계의 스타로 급부상시킨 것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오늘 나는 말합니다. 진보적인 미국, 보수적인 미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단합된 미국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이 따로 있는 것도 라틴계의 미국, 동양계의 미국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합된 미국이 있을 뿐입니다” 이념과 인종의 초월을 역설하는 젊은 흑인 정치가에게 전 미국은 열광했었다.
‘초당적 협력정치’는 오바마에게 숙원의 과제였다. 2008년 대선 캠페인 때도 대표 공약이었고 대통령 취임 전부터 공화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며 초당적 협력을 위한 터 닦기에 정성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의 재임 중 악화일로를 걸어온 미 정치의 양극화는 지금 부채상한 협상을 결렬시키고 국가부도사태를 인질삼은 채 전 세계의 주시 속에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민주-공화 양당의 지도자들은 나라위한 해결책 모색이라기보다는 영토확장 전쟁 중인 적대 부족들처럼 완강하게 맞서고 있지만 그래도 디폴트는 피해갈 것이라는 예상이 아직은 우세하다.
채무 불이행 사태를 모면한다 해도 후유증은 심각할 것이다. 국가 신용등급 하락은 벌써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제3세계 신생국에서도 애들 같은 기 싸움으로 나라를 위기로 내몰진 않는데…” 국제사회의 야유도 감수해야 한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국내의 여론이다. 실망을 넘어 분노와 좌절로 이어지며 정부에 대한 불신과 염증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알카에다나 탈레반 같은 외부의 적만 위험한 게 아니다. 미국의 입지를 흔드는 정치가들의 무모한 자해를 지켜보며 “양극화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 정치의 양극화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처럼 비정상적인 대치는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가.
‘초당적 협력’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워싱턴을 아우르지 못한 오바마의 리더십이 부족해서일까? 책임을 피할 수는 없지만 부채협상에 관한 한 그는 진보 아닌 중도에 발 딛고 서서 타협을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정부축소를 주장하며 극우보수를 대변하는 티파티의 탓일까? 상당 부분은 그렇다. 그러나 티파티 자체보다는 “티파티가 전국의 주목을 받으며 워싱턴을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미정치 시스템이 근본적 원인의 하나라고 CNN의 해설가 파리드 자카리아는 지적한다.
민주-공화 양당은 창당 이래 150여년 대립해 왔지만 타협의 여지는 언제나 충분했다. 양쪽을 이어주는 중도파 의원들이 넉넉히 포진하고 있었다. 적어도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민주당의 존슨대통령이 민권 어젠다를 입법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북동부 출신의 진보적 공화의원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공화당 대통령 레이건의 예산안이 하원을 통과한 것도 남부출신 보수적 민주당 의원 60명의 찬성표 덕분이었다.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이젠 중도파 의원들이 설 자리가 없다. ‘소신을 갖고 대의를 위해’ 당론에 불복했다간 재선 포기를 각오해야 하는 게 요즘 의원들의 실정이다.
레이건 시절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미키 에드워즈와 자카리아는 당 예선 및 선거구 재조정 제도 등을 그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사실 현재의 당 예선은 지역구를 대변할 능력보다는 당 이념의 선명성 경연대회처럼 변해 버렸다. 공화당이 특히 심하다. 2010년 선거에서 밥 버넷같은 중진이 예선에서 티파티 후보에게 패배했는가 하면 존 매케인이나 오린 해치 같은 리더들도 예선 탈락이 두려워 극우보수로 입장을 선회했다. 유권자나 당 지도부 보다는 극단적 보수운동가들이 예선의 당락을 좌우하는 경향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선거구 재조정도 정치가들에 의해 설계되니까 새 선거구는 당파성이 강한 각 당의 안전의석으로 정착된다.
선거 시스템이 당파성 강한 후보 선출을 부추기는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 재선을 보장받아야 하는 의원들에겐 국익에 앞서 충성해야 할 것이 당익이다. 극단적 운동가들이 좌우하는 다음 예선을 계산한다면 상대당과의 협조는 불가능하다. 타협을 회유하는 당 지도부에 대한 반란도 서슴치 않는다…양극화는 이렇게 점점 깊어진다.
캘리포니아가 지난해 주민투표로 통과시킨 것처럼 당 예선을 ‘오픈 프라이머리’로 바꾸고 선거구 재조정을 초당적 독립위원회에 맡기는 등의 제도 변화는 양극화 해소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첫 단계라고 에드워즈와 자카리아는 제안한다. 각 당의 예선에서도 당적에 관계없이 모든 유권자가 투표하게 되면 극단적 이념가들의 장악력이 훨씬 약화될 테니까.
이런 변화는 거대한 정치제도의 작은 한 부분 개혁에 불과하지만 그것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끄럽고 과격한 소수의 뒤에서 침묵해온 다수가 언제까지 양극화의 횡포를 참지는 못할 것이다.
워싱턴의 양극화와는 달리 미국엔 난 극단적 보수도 극단적 진보도 아니라고 공언하는 ‘무소속’이 점점 늘어나 현재는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종래 민주당의 예산낭비를 못마땅해 하고 공화당의 세금감면을 반가워도 했지만 이번처럼 나라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는 비양심적 정치게임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유권자들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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