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이스트 조지아의 한 푸드뱅크에서 식료품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 늘어나는‘식생활 불안정자’
미국의 경기침체는 2년 전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정부가 각종 경제수치에 근거해 내린 결론은 그렇다. 그러나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아직도 찬바람 도는 영하권이다. 워싱턴주 시애틀 외곽 이사콰에 거주하는 소니아 크루즈는 “No”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가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개당 1달러인 레드박스 DVD를 빌려보자는 ‘철없는’ 남편에게 그녀가 들려주는 대답은 “No”다. 이전처럼 콜드스톤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아이들은 엄마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알기에 콜드스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말은 아예 입 밖에 내놓지 조차 않는다. 눈치 빤한 아이들 스스로 ‘자체 검열’을 하는 셈이다.
불황 시작된 이래‘배고픈 중산층’부쩍 늘어
미국인 7명 중 한 명 ‘식품보조 프로그램’가입자
“정부 지원으론 한계… 기업들 더 적극 도움을”
남편이 일자리를 잃은 후 모기지 연체로 집을 차압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풍족한 생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가끔씩 가족이 함께 극장도 가고, 외식도 즐겼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콜드스톤 아이스크림 가게는 가족 나들이의 마지막 코스였다.
그때만 해도 크루즈는 그녀의 가족이 전형적인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경제 빙하기가 닥치면서 거짓말처럼 상황이 바뀌었다. 수입이 끊어지자 가계 빚이 쌓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고지서를 제때 납부하기조차 힘들어졌다. 이 모든 게 눈 깜빡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생활비 절약은 필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벌이가 없으니 절약하고 말고 할 돈도 없다. 그보다 시급한 일은 그녀와 남편이 새로 일자리를 잡을 때까지 아이들을 굶기지 않는 일이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수치심을 억누르고 푸드스탬프를 신청했다.
‘중산층 의식’에 얽매여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기엔 사정이 너무 다급했다. 그녀의 ‘의식’은 중산층이었지만 ‘현실’은 빈곤층이었다.
크루즈 가족처럼 정부나 민간 자선단체로부터 식비나 식품보조를 받는 ‘중산층 출신’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중산층의 일각이 경기침체의 된서리를 맞아 허물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전국 200여개 푸드뱅크 네트웍를 거느린 미국 최대의 기아구호 자선단체 ‘피딩 아메리카’(Feeding America)의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인 비키 에스카라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자선단체에 의존하지 않았던 도시외곽 중산층 지역 가정의 빈곤화가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굶주림은 미국 경제가 활력을 보일 때도 ‘빅 이슈’였다.
예를 들어 미국 경제적 붐의 끝 무렵이었던 2007년 국내 전체 가구의 11%에 해당하는 1,300만명이 ‘식생활 불안정’ 그룹으로 분류됐다.
‘식생활 불안정’이란 적정량의 영양식에 접근할 능력을 갖지 못한 상태를 지칭하는 정부의 공식 용어다. 말하자면 미국 경제가 잘 나가던 2007년 말에도 미국 내 10가구 가운데 1가구는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배를 곯은 것은 아니다.
농무부 경제연구서비스 소속의 사회학자 마크 노드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식단의 질을 낮추고 음식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배고픔을 피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질’보다 ‘양’에 초점을 맞춘 빈곤형 식생활로 굶주림은 면했지만 적정량의 영양식을 섭취하진 못했다는 결론이다.
2008년 경기침체가 본격화되면서 ‘식생활 불안정’ 해당자는 1,700만명으로 급증, 농무부의 모니터링이 시작된 1995년 이후 최고수준을 기록했다.
지난해 11월에 발표된 가장 최근 자료에 따르면 식생활 불안정자는 무려 1,740만명을 헤아렸다.
농무부는 ‘식생활 불안정에 관한 연례 보고서’에서 역사적으로 기아에 취약성을 보이지 않던 그룹 사이에서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연방 정부의 최대 기아구제 프로그램인 식품보조 프로그램(SNAP) 가입자는 미국인 일곱 명 가운데 한 명 꼴인 4,400만명에 달하고 이 중 절반이 어린이들이다. 푸드스탬프로 알려진 SNAP는 연방정부의 재정지원 하에 각 주정부가 시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외에 정부와 연계된 푸드뱅크나 커뮤니티 혹은 교회 차원에서 운영하는 빈민급식소인 푸드 팬트리나 수프 키친도 3,700만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빈민급식소 이용자 수는 지난 2006년에 비해 46%가 늘어났다.
연방정부 재원으로 운영되는 15개 식품보조 프로그램의 총괄 책임자인 농부무의 케빈 콘캐논 소비자 서비스담당 국장은 “비상식품 지원을 자진해서 요청한 미국인의 수는 사상 최대 규모”라고 전하고 “대공황 이래 식품지원을 이처럼 절실히 필요로 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연방정부의 식품보조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산층에도 제공된다. 집과 일자리를 갖고 있다 해도 현재의 실질적 형편이 열악하면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있으나 해당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 같은 사실을 모른다.
농무부는 이 때문에 연방정부의 주요 지원 프로그램 수혜자격을 갖춘 대상들 중 3분의1 정도만이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피딩 아메리카’도 정부의 지원만으로는 ‘미국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피딩 아메리카의 CEO인 에스카라는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기업들이 이미 상당한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우리는 재정지원 혹은 각 주정부와의 협력 등의 방식을 통해 업계가 좀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SNAP을 신청해 지원을 받고 있는 ‘중산층 출신’ 수혜자 크루즈는 “배고픈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최근 한 친구가 여성과 유아, 어린이를 위한 식품지원 프로그램인 WIC에 등록하는 것을 도와주었다”며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같은 처지에 속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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