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의 일이다. 토요일 아침 일찍 집사람과 동네에서 산책을 했다. 평소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호수 주위를 도는데 그날따라 동네의 큰 길로 걷기로 했다. 이 길은 언덕들이 많이 있어 운동 삼아 걷기에는 좋은 코스다.
그런데 목표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반대편 방향으로 걸어오는 한 노인을 보게 되었다. 한국분인 것 같아 보여 인사를 간단히 드리고 지나가다 조금 석연치 않아 돌아섰다. 연세가 제법 드신 이 분의 얼굴에서 약간은 당황하는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신지, 도와드릴 일은 없는지 여쭤보았더니 집을 못 찾겠다고 하셨다. 문제는 집 주소나 전화번호를 모르신다는 데 있었다. 아무런 신분증도 소지하지 않으셨다. 한국서 오신지 얼마 안 되셨는데 따님 집에 머물고 계시다고 했다. 딸 이름은 알지만 사위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하셨다. 집을 나온지 한 두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 동네길과 집 모양이 모두 비슷하여 도저히 못 찾겠다는 말씀이었다. 일단 우리 집으로 모셨는데 놀란데다가 갈증이 심하셨는지 물을 꽤 많이 드셨다.
그런데 어떻게 집을 찾아드릴지가 막막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집이 25번 도로 근처에 있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 동네 근처에는 25번 도로는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25번 도로는 속도제한 표지판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주택가이니 당연히 25마일 속도제한 표지판이야 여러 곳에 널려 있을 텐데 그 표지판만 생각하시고 따님 집을 찾으셨던 것이다.
전화번호부에서 전화번호를 찾아보려 해도 사위 명의로 등록되어 있을 텐데 사위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으신다니 그것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마침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들이 공부를 잘해 영재 프로그램에 있다는 말씀을 하셔서, 그 동네 영재프로그램이 있는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께 연락해서 알아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손자들의 이름은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여동생의 남편이 목사님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 목사님의 이름을 기억하셨다. 다행히 내가 아는 목사님이어서 통화를 할 수 있었고 드디어 따님 댁의 전화번호를 받아 어머님을 모셔가라는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따님은 어머님이 동네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계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냥 새벽기도에 가셨다가 교회에 계속 계시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족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영하의 추운 겨울날이나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는 뜨거운 한여름 날씨였다면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이와 비슷한 일을 내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빌딩 내에서 겪게 되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아니라 어린아이였다. 9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울상을 한 채 계속 3층 단추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어보자 엄마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엄마 전화번호를 물어보자 모른다고 하며 그냥 우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층에서 설 때마다 3층에 빨리 가야하는데 너무 늦어진다고 비명이었다. 마침 점심시간 때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거의 매 층마다 섰었고 그 아이의 초조해함은 몸 전체로 표현되고 있었다. 3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아이와 함께 나가보았으나 엄마는 그곳에 없었다. 엄마를 꼭 찾아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도 놀란 아이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다행히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바로 바깥에서 아이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었겠지만 그 아이에게는 너무도 무서웠던 시간이었음은 물론이다.
어린애들과 연세가 드신 분들은 항상 신분증과 연락처를 소지하고 있도록 해야 한다. 사는 동네 바로 앞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고, 엄마와 손잡고 의사 선생님을 방문하러 왔다가도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보호자 연락처가 적힌 노트를 늘 지참하도록 한다면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특히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를 전혀 못하는 경우 이러한 예방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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