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총’이란 말이 있었다. ‘발로 뛰는 총영사’를 줄인 것으로 한인사회에서 부지런히 다니며 일하는 총영사를 일컫는 애칭이었다. LA 총영사관의 첫 현지 출신 총영사로 기록됐던 김재수 전 총영사가 한때 이 소리를 들었다. ‘만총’도 있었다. ‘툭하면 관저에서 만찬이나 하는 총영사’라는 의미였는데, 별다른 일은 안하고 이사람 저사람 불러다가 국고만 축낸다는, 별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이외에도 사무실에만 처박혀 있다고 해서 ‘방총’, 본국 정권의 눈치만 본다고 해서 ‘눈총’ 소리를 들은 총영사도 있었는가 하면, 김명배 전 총영사의 경우는 한인사회의 신망을 받아 ‘명총’으로 불리기도 했다.
LA에 새로 온 신연성 총영사가 부임한 지 어제로 딱 100일이 지났다. 그는 부임과 함께 소위 ‘소총’을 강조했다. ‘소통하는 총영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현지 출신이었던 전임과 달리 정통 외교 관료 출신이기에, 고압적인 관료의 모습을 보였던 몇몇 전임 총영사들의 선례로 미뤄 ‘과연 그럴까’하는 시선도 없지 않았지만, 부임 직후 안수산 여사를 방문하고 이민 선조들의 묘지도 찾고 또 웬만한 한인사회 행사 참가나 단체들과의 만남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최근 총영사가 보인 행보는 한인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이달초 LA에서 열렸던 ‘제1회 미주한인 정치 컨퍼런스 및 차세대 포럼’ 행사에서 신 총영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행사는 한인사회에서는 처음으로 미국내 한인 전·현직 정치인과 공직자와 주류사회 거물 정치인들 및 한국의 여야 주요 국회의원, 그리고 한인사회 차세대 리더를 꿈꾸는 젊은이들까지 400여명이 함께 모여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 등 발전 방향을 꾀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총영사로서는, 바쁜 시간을 쪼개 어려운 걸음을 한 캘리포니아 주지사실 장관과 남가주 지역 주요 연방의원, 그리고 버지니아, 조지아, 워싱턴 등 타주의 의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인 정치인들까지 한꺼번에 만나 교류하고 외교관으로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영사관이 밝힌 불참의 이유가 어이없었다. ‘정치적 성격의 동포단체 행사 참석’과 ‘국회의원들의 개별적 방문시 의전 제공’을 금지하는 외교부의 지침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교부의 지침이야 ‘재외선거를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임무를 띤 공관원들이 특정 정파를 위한 정치성 행사에 얼쩡거리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말라’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번 행사는 어떤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이익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 순수하게 한인사회 전체의 정치력 신장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자리였고, 한국의 선거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 굳이 ‘중립적’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조차 없는 초당적, 초정파적일 것임은 누가 봐도 분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행사 명칭이 ‘정치 컨퍼런스’이고 한국 정치인들이 참석한다고 해서 총영사가 이를 피했다니, 그 판단력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총영사가 행사 다음날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를 포함해 한국에서 온 국회의원들과 관저에서 만찬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공식 행사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총영사가 바로 다음날 똑같은 정치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총영사는 관할지역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책임자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열심히 발이 닳도록 뛰어야 하는, 외교 활동이 본분인 외교관이다. 그런데 ‘정치력 신장’을 위한 행사인지 ‘정파적’ 행사인지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더할 나위 없는 외교 활동의 기회를 일부러 외면했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중국 상하이 영사관 등에서 발생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외교관들의 개인 비리나 부적절한 처신도 큰 문제지만, 좀처럼 다시 오기 힘들 훌륭한 외교 활동의 장을 이해할 수 없는 핑계를 대며 외면한 자세도 외교관의 본분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총영사는 이번 일을 계기로 진정 국익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돌아보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순간 ‘만총’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종하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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