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개혁은 죽었다. 백악관도 알고 의회도 안다. 불법체류자들에게 시민권의 길을 열어줄 개혁법안 추진에 앞장 서온 이민 운동가들까지도 마음속으론 알고 있다…”
지난 주 오바마 대통령이 텍사스에서 이민개혁 연설을 한 후 워싱턴 온라인 매체 ‘더 힐’에 올려진 백악관 출입기자의 블로그 첫머리다. 이것은 또 미 정계안팎 상당수 이민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이민개혁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년 대선까지는 그렇다. 민주당 대통령과 민주당 상하원 - ‘친이민’ 민주당 천하로 시작된 오바마 시대 2년 반의 이민정책 결산이 이렇게 초라하다.
실망하고 분노해도 이민계 유권자들에겐 신통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꺼이 ‘최선’을 택하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차악(次惡)’을 골라야 한다. 노골적으로 반이민의 깃발을 흔들어대는 공화당에 표를 줄 수 없으니, 소극적으로 몸을 사려도 말로는 확실하게 친이민을 주창하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에 대한 이민커뮤니티의 기대와 실망이 반복된 것은 공화당 천하를 폐막시킨 2006년 중간선거 이후부터, 벌써 5년째다. 그동안 티파티의 득세와 함께 더욱 모질어가는 공화당에 대한 반감도 계속 깊어졌지만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민주당에 대한 환멸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 연말 하원에서 통과되었던 드림법안은 상원에서 무산되었다. 55대41로 5표가 부족해 공화당의 필리버스터 벽을 넘지 못했다. 민주당 의원 5명이 반대하는 공화당에 가담한 것이다. 정치적 계산에 집착한 이들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자당의원들을 설득하건, 압박하건 오바마의 리더십이 당론이탈을 막을 만큼 강력했더라면 드림법안은 입법화되었을 것이다. 지금쯤 수십만 젊은 인재들이 가슴을 펴고 푸른 내일을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절호의 기회를 민주당이 놓친 것이다. 아직도 그늘에서 숨죽이는 ‘우리 아이들’을 속수무책 바라만 보는 이민사회의 절박함을 헤아린다면 오바마도, 민주당도 선거 때면 찾아와 표를 거둬가는 전략만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2008년 7월 대선 캠페인 때 오바마는 이민개혁을 “최우선과제로 삼아 취임 첫 해에 성사시키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헬스케어와 경기부양에 밀리고 반 이민여론에 채이면서 결국 공약(空約)이 되어버린 이민개혁을 최근 재선 캠페인에 돌입한 오바마가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주 대상은 물론 초고속 성장 중인 히스패닉 표밭이다. 히스패닉 교계 조찬기도회, 히스패닉 명사들 백악관 초청에서 멕시코 접경지대 방문까지 지난 2주 열심히 손을 내밀며 ‘이민의 나라’ 미국의 이민개혁 필요성을 역설했다. 진지한 정책 수립이 아닌 속보이는 정치 캠페인이라는 비난이 속출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대통령다운 진지한 정책수립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재선 위한 선거 전략이라도 나쁠 것은 없다. 단 이번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아직도 히스패닉을 비롯한 이민계는 오바마 표밭이다. 그러나 2008년의 열기는 식은 지 오래다. 당시 64%였던 히스패닉계의 오바마 지지도는 금년 3월 조사에선 툭 떨어졌다. 내년 대선에서 오바마를 뽑겠다는 응답이 43%로 줄었다. 작년 중간선거에선 69%가 기권했다. 이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데는 이민개혁만큼 매력적인 이슈도 드물다.
공약(空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대충 세 가지다.
첫째는 이민개혁안 통과로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다.
둘째는 포괄적 이민개혁안을 부문별로 쪼개는 별도법안 성사다. 어릴 때 부모 따라 입국한 후 불체자가 된 청소년을 구제하는 드림법안, 농장과 요식·건설업계 인력 공급을 위한 초청근로자법안 등을 별도 상정해 통과시키는 것이다.
드림법안은 인도적 측면에서 상당히 호소력이 있으며 초청근로자법안은 기업들의 적극지지가 힘이 될 수 있다. 드림법안은 지난주 이미 재상정되었고 두 법안 모두 장·단기적으로 미국경제에 플러스가 되는 정책이지만 공화당이 반이민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현재의 의회에선 통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셋째는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통한 이민자 보호조치다. 특히 이민 관계자들은 드림법안의 대상인 불체신분 학생들에 대한 추방유예조치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런데 아직 오바마는 의회와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하고 있다.
최근 오바마는 몇 차례 연설을 통해 이민개혁이 국가의 장래를 위한 ‘도덕적 의무’라면서 당위성을 강조했으나 그 실현을 위한 어떤 새로운 플랜도, 구체적 일정도 제시하지 않았다. ‘더 힐’의 지적대로 이민개혁이 이미 죽어버린 것을 알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젠 말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때다.
드림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불체학생들의 추방을 유예시키는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오바마가 이민사회에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라고 생각한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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