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70세)를 넘긴 후 체력도, 의욕도 위축돼 스스로 외부와 담을 쌓고 사는 한인 노인이 많지만, 우리 주변엔 젊은이 못지않게 활발한 삶을 계속 영위하는 ‘메리 시니어’(즐거운 노인)들도 적지 않다. 각 지역 한인 노인회는 그런 젊은 노인들의 놀이터다.
산수(傘壽, 80세)가 지난 P씨는 요즘도 아들, 손자뻘 젊은이들과 어울려 등산을 즐긴다. 체력이 모자라 중간에 내려오더라도 주말 산행에 낀다. 집에서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독서광이다. TV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반주를 곁들이는 소식 덕분에 평생 ‘몸짱’이다. 귀가 조금 흐린 것 말고는 당뇨, 고혈압 따위의 노인병 증세가 전혀 없다.
P씨와 부인의 생활신조는 ‘간섭 안 하고 간섭 안 받기’다. 그래서 부인은 교회 일에 전념하고 P씨는 독서로 소일하며 주중에도 때때로 친지들과 산에 오른다. 궂은 날씨엔 책꽂이나 탁자 등 간단한 가구를 뚝딱뚝딱 만드는 게 취미다. 차고에 웬만한 장비를 두루 갖춰 놓은 아마추어 목수이다. 노인회에 나가지 않아도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단다.
한인사회의 모든 노인이 P씨 같다면 ‘노인문제’는 딴 세상 얘기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한인 노인들이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계와 의료 등 먹고 사는 문제가 주로 거론되지만 자녀 등 가족 친지와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외로움도 무시 못한다. 이민 후 언어장벽에 부딪치며 살아온 한인 노인들의 사회적 소외감은 본국이나 미국 노인들보다 훨씬 크다. 더구나, 배우자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의 비애는 말로 형용 못할 정도다.
얼마 전 시애틀 다운타운의 한 노인 아파트에서 독거노인 송용직(70)씨가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이웃 한인들에 따르면 송씨는 자녀가 없고, 부인과는 10여년 전에 이혼했으며, 여동생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한때 일했다. 허리통증으로 척추수술을 몇 차례 받았고, 사체로 발견된 당일에도 위장계통의 수술을 받기로 병원에 예약돼 있었다.
송씨는 2년반 전 이 아파트에 입주한 후 거의 두문불출했고 찾아오는 친지도 없었다고 이웃들이 전했다. 소파에 웅크린 송씨의 사체를 발견한 사람도 정부 지정 간병인이었다. 칼로 찌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몸에 시커멓게 엉켜 있었다. 송씨에게 가끔 따뜻한 음식을 건넸다는 옆방 한인은 그가 평소에도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전했다. 송씨는 가난, 신병, 고독, 우울증 등 독거노인의 보편적 고통을 두루 지닌 샘플이었다.
본국에서도 노인문제, 특히 독거노인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영양 개선과 의학기술 발달로 평균수명이 연장돼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무섭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 노인인구는 11년 후인 2022년 전체 인구의 14%를 점유하게 돼 유엔 규정에 따라 ‘고령사회’로 분류된다. 그 8년 후인 2030년엔 노인이 20% 이상을 점유하는 ‘초 고령사회’로 건너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사회라는 오명을 안게 될 전망이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백년해로 상팔자’이다. 자식의 부양을 받지 못해도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외로움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노인 5명 중 한 명 꼴인 독거노인들 가운데는 자살은 물론 외로움에서 초래되는 ‘고독사’가 많다. 굶주림, 질병 등으로 쓸쓸하게 죽은 후 며칠, 몇 주일, 심할 경우 몇 개월 뒤에 주검이 발견되기도 한다.
미국의 노인복지가 금방 개선될 수는 없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각급 정부가 사회복지 예산을 무자비하게 깎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령이 정부혜택을 받는 자격이나 권리를 의미하진 않는다. 노인문제는 불완전한 사회보장 제도보다는 본인의 정신적, 심리적 준비상태가 미흡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산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듯 노인 되는 것도 도전이다.
송씨도 같은 아파트의 많은 이웃 한인들처럼 매주 두 차례 노인회에 나가 떠들며 웃고, 일요일엔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며, 토요일엔 P씨처럼 산행으로 건강을 챙기면서 독거의 번뇌에 도전했더라면 생을 자살로 마감하는 비극은 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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