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에 신작전 준비
김병기 화백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하는데 난 오늘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가 중요한 것이니까요”
“등잔 밑이 어두워요. 중요한 사람은 바로 우리 곁에 있거든”
“나도 중요한 사람이에요. 94세가 되도록 그림만 생각한 사람이니 그것만 해도 대단하지 않은가요?”
“회고전을 열자고들 하는데 관심 없어요. 나는 회고전이 아니라 신작전을 하고 싶으니까. 나이 90 넘어 신작전 한 사람은 많지 않은데, 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흔 넷의 고령에도 이렇게 밝고 맑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이 드는 게 무어 두려우랴.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정신
로스펠리츠 자택에서 지금도 매일 캔버스 앞에 붓을 드는 현역화가 김병기 선생은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는 분이다. 단지 훌륭한 노인으로서 혹은 원로화가로서가 아니라 격동의 한 세기를 예술 최전방에서 살아온 인물로서, 삶과 예술과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단순해서 감동적이다.
지난해 초 아트 좋아하는 사람들이 김병기 선생을 모셔다 미술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서양미술사와 한국미술사를 화가, 작품, 지명, 연도, 배경까지 정확하게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은 물론 김환기, 이중섭, 이상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의 재미있는 일화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두 시간 열강에 완전히 넋을 잃었었다. 유머 감각도 대단하고 총기는 젊은 사람들보다 좋은데 그보다 더 우리를 매혹시킨 것은 그에게서 자연스럽게 번져나오는 ‘인자하고 우아한 영혼의 빛’이었다.
김병기 선생은 한국서양미술 1세대의 마지막 증언자이고, 경기여고 이화여고 서울예고 서울대 미대에서 처음 가르친 최초의 미술교사이며, 화가이자 미술평론가로서 남북한에서 ‘초대’가 붙은 장이란 것은 다 해본 인물이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부터 시작해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한국관 커미셔너로 참가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은 한국 최초의 국제전 심사위원 기록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최초 평론가·국제전 심사위원
한국 서양미술사의 시작 그 현장에 있었던 김병기의 일생은 개인사와 미술사가 날실과 씨실처럼 얽혀 있어 그 자체로 귀중한 역사다. 한국미술기록보존소는 그의 이야기를 3권에 이르는 방대한 구술녹취 문집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는데 당연히 가장 널리 알려졌어야 할 그의 이름이 어떤 이들에게 생소한 것은 그의 생애 후반 45년을 미국에서 조용히 살아왔기 때문이다.
김병기 화백은 평양에서 대부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3인 중 하나인 김찬영으로, 고희동, 김관호와 함께 도쿄 우에노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했다. 부친은 결혼하자마자 집을 떠났고 나중에 뛰어난 미모의 서모를 들였는데 이런 일들이 어린 김병기에게 반항심과 그리움을 함께 남기며 큰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하다. “아버지의 심미주의 유산과 어머니의 경건한 종교교육이 내 안에서 싸우면서 내 예술과 인생을 형성했다”고 회상하는 김 화백은 광성고등보통학교 나온 18세 때 도쿄로 건너가 아버지의 지지로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1년 후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로 옮겨 그때 유럽에서 태동된 다다이즘에 심취하게 된다.
도쿄 유학중 김환기와의 만남
“도쿄미술학교에서는 6개월 동안 스튜디오에 들어박혀 석고 데상만 해야 했는데 ‘도대체 내가 왜 그리스 로마의 장군들 얼굴을 그려야 하나’하는 불만이 가득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간다 책방 거리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라는 이름이 붙은 4층 건물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거야. 무조건 들어갔지. 거기서 만난 친구가 김환기예요”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 선생은 피카소의 친구로 20년만에 일본에 돌아온 사람인데 큐비즘 등 당시로선 어려운 미술이론을 아주 쉽게 가르쳤다. 그때 일본에는 아방가르드 미술과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창조운동 등이 마구 유입되고 있었는데 아방가르드 연구소는 추상운동과 초현실주의를 동시에 받아들인 곳으로, 김화백이 훗날 미술평론과 교수가 된 배경에는 이때 책을 많이 읽고 이론에 밝아진 것이 바탕이 됐다.
“1951년 부산 피난시절부터 서울대 미대 교수를 맡아 7년동안 예술론을 가르쳤는데 사실 난 학교에서 이론을 배운 적이 없어요. 그저 책을 많이 읽고 이론적으로 잘 따지던 사람이라 그냥 내가 직접 쓰면서 이론으로 정립한 거지. 평론도 배운 적이 없는데 아무도 새로운 미술에 관한 평을 쓰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했어”
동창 이중섭 장례식 치뤄줘
그렇게 개척한 미술평론이 책으로도 나왔고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 안에 ‘김병기 예술론’이 따로 있다고 한다. “좀 어렵지만 잘 썼지. 사실은 평론가, 교수 하려고 미술 한 것이 아닌데 그땐 남북이 갈라지고 나라가 세워지던 때라 파란만장 했어. 30세에 평양에서 해방 맞아 다음날로 평양 유지들 밀서를 들고 서울로 내려왔던 시절이니까”
이야기는 다시 도쿄으 돌아가서, 위로 세 살 많았던 김환기와 참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달도 그리고 학도 그리고 항아리도 그리던 김환기가 뉴욕에 와서는 점을 찍기 시작한 모습을 보고 ‘목탁 두드리는 것처럼 없어진 친구들 생각하며 찍은 것’이라는 비평을 처음 한 것이 나였다구”
이중섭은 그의 소학교 동창이었다. “죽으면서 무연고자 처리됐는데 내가 적십자병원 시체실에서 처음 찾아내 문총에 알리고 예술인장을 만들어 치러줬지.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해 그의 뼈를 부숴 분으로 만들고 일부는 산에 뿌리고 일부는 망우리에 묻은 것도 나였어요”
당시 그가 한 시인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이중섭 전기가 되어 나왔고, 그 전기를 바탕으로 연극도 만들어지고 이중섭 세미나도 많이 열렸다고 한다. “다들 이중섭과 친하다고들 하지만 태반이 거짓말이야”
시인 이상과도 교류 활발
“이상 시인은 한국의 탁월한 다다이스트였지. 한번은 이상이 도쿄의 우리 집에 와서 잤는데 서른살쯤 됐던 그의 모습이 마치 50은 된 것처럼 늙고 초췌해서 깜짝 놀랐어요”
격변기 한국의 문화예술 최전방에서 예술인들과 교류했던 김병기 선생은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 후 미국 동부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화단에서 멀어졌다. 그해 록펠러 재단 그랜트로 김창렬과 미국 30개 도시를 일주했고, 사라토가 스프링스의 스키드모어 칼리지의 방문교수로 초청돼 동서양미학 비교론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한국인이 전혀 없는 이곳에서 20여년 연락을 두절하고 살았던 탓에 한국서는 김병기가 죽거나 증발했다고들 했다고 한다.
5년 전 LA 이주, 자연에 매료
어느 날 가나화랑 대표가 미국에 왔다가 그를 보고는 당장 초대전을 주선했고, 실로 오랜만에 한국서 개인전을 가진 것이 86년. 작품은 즉시 다 팔렸고 그때 이후 가나화랑 전속작가가 돼 몇차례 더 초대전을 가졌던 김 화백은 올 연말 또 한 번의 신작전을 열 계획으로 현재 작업 중이다.
생애 후반의 근 50년 세월을 미 동부와 프랑스에서 지내다 5년전 맏아들 가족이 있는 LA로 이주해온 김 화백은 LA의 자연과 바다에 매혹돼 있다. 그 오랜 세월동안 화가로서 한 번도 붓을 놓아본 적이 없다는 김병기 화백은 요즘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초현실주의에 끌려 비형상의 극단까지 갔다가 미국에 와서 다시 형상을 찾고 있어요. 형상 속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지. 가족도 그리고, 나도 그리고, 스튜디오 창밖으로 보이는 그리피스 산 동쪽, 할리웃 산도 그리고 있어요. 뉴욕은 관념을 이야기하는데 LA는 자연과 바다는 기가 막힌 곳이지. 자기가 자기를 모방하는 그림 아니라 아주 새로운 그림,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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