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기곡경(旁岐曲徑)이라는 생소한 사자성어가 부각된 적이 있었다. 매년 한국에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해 발표하는 교수신문이 지난 2009년 이를 선택하면서였다. ‘옆으로 난 샛길과 구불구불한 길’이라는 뜻으로 ‘일을 바른 길을 좇아서 순탄하게 하지 않고 옳지 않은 방법을 써서 억지로 함을 이르는 말’이라는 게 사전의 풀이다.
당시 보도들을 다시 보니 ‘방기곡경’은 율곡 이이 선생의 저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왕도정치의 이상을 다룬 저서 ‘동호문답’에서 율곡 선생은 “제왕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도학을 싫어하거나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구태를 묵수하며 고식적으로 지내거나 외척과 측근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망령되게 시도해 복을 구하려 한다면 소인배들이 그 틈을 타 갖가지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일을 순리대로 하지 않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억지를 써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읽힌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 사자성어이지만, 최근 한인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몇 상황들이 ‘방기곡경’의 뜻을 곱씹어 생각하게 만든다. 올 들어 이사장 선출 분쟁으로 시끄러운 ‘한미동포재단’ 사태가 그 중 하나다. 외부에서 볼 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억지’들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 1월로 임기가 끝난 전임 이사장이 이사회에서의 신임 이사장 선출 과정을 문제 삼아 신임 이사장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이 이사장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면서부터 비롯됐다. 당연직 이사인 총영사의 직접 참석 여부를 놓고 정족수에 문제가 있다며 신임 이사장 선출 절차가 무효라는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느 이사회 때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점을 느닷없이 들고 나왔으니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반발이 당연히 나올 만한 상황이었지만, 사태는 결국 법적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소송 관련 비용을 재단 공금에서 사용하고, 양측이 서로 재단 사무실을 사용하겠다며 물리적 충돌까지 벌이는 꼴은 아무리 봐도 볼썽사납다.
사실 한미동포재단과 관련해 일반인들이 보기에 어이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 2006년에는 한인회와 재단 양측이 감정싸움 끝에 서로 상대방의 ‘퇴거’와 ‘해체’를 요구하는 대판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었고, 2008년에는 한인회관 강당 입구에 직전 이사장을 지냈던 인사의 개인 회사 명칭을 이름을 떡 붙여놓았다가 반발 여론에 밀려 이를 떼어 낸 적도 있었다.
한미동포재단은 ‘커뮤니티의 재산’인 한인회관 건물을 관리·운영하는 단체다. 역사적으로는 그 뿌리가 1962년까지 올라가 당시 김호 선생 등 초기 이민 세대 인사들이 한인회관 건립에 나선 후 1975년 현 재단 전신인 ‘남가주 한인재단’이 세워져 당시 한국정부 지원금과 한인사회 성금으로 현 한인회관 건물을 구입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미동포재단의 이사장이나 이사직은 한인사회로부터 공공 재산 관리자의 임무를 위탁받은 것이지 군림하는 ‘감투’가 아니다. 건물주인 한인사회의 심부름꾼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드니 억지가 횡행하고 사단이 나는 것이다.
물론 한미동포재단 이사 활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생업과는 무관한 일에 무보수로 자기 시간을 써야 하고 만만치 않은 액수의 이사회비도 낸다. 그런데 이같은 일은 한다는 사람들이 희생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감투싸움이 전부인 것처럼 티격태격하고 있는 상황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분쟁의 당사자가 한미동포재단 이사장직을 놓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이유가 한국에서 임명하는 주요 단체장 자리를 해보겠다는 ‘딴 뜻’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들도 돌고 있는 상황이다. 한미동포재단 이사장이나 이사들은 한인사회의 자산인 한인회관 건물을 오롯이 관리하고 운영해 다음 세대에 잘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개인적 이익을 앞세워 억지를 부릴 곳이 아니다. 분쟁의 당사자들이 아집을 버리고 커뮤니티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종하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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