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8년생이니까 소위 일제 시대를 7년 겪고 광복을 맞은 세대이다. 36년 압제에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반인류적 만행에 대해 배우고서는 일본이나 일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는 세대였다. 내 자신이 해방 이후 일본 사람을 처음 만난 게 1960년 말 장면 정부에서 당시 엄민영 참의원을 단장으로 한 학생문화사절단을 일본에 보냈을 때다.
한일 간의 민간인 내왕이 드문 시절이었기에 아사히 신문기자가 사절단 활동을 동행하면서 보도하는 과정에 그와 여러 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때 일본 사람들 하면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했던 나의 선입관이 많이 잘못 되었음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만 아니라 열흘 남짓 일본 여러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의 공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도 나의 편견을 고치는데 역할을 했다.
하와이 대학의 조교수시절이었던 1971년에는 이런 경험도 있었다. 여름방학 3개월 동안 집을 세주고 한국에 가 있으려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의 소개로 하와이 동서 문화센터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으로 부임하게 된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이었던 나가이 박사가 그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떠나기 바로 전에 나가이 박사 부인이 아이들 교육문제로 동경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에 그가 우리 집이 아니라 방 하나짜리 아파트로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3개월 치의 세로 1,50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왔다.
계약서도 없이 제3자를 통한 구두 계약이었지만 약속은 지켜야 된다는 신사도의 표시였던 셈이다. 당시 조교수의 연봉이라는 게 1만2,000달러 내외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 집에 살지 않으면서 지불한 돈을 유용하게 썼던 기억이다.
1980년대에 들으니까 그가 문부대신(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다고 해서 역시 인물이구나 싶었다.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었던 김성수 전기를 읽다가 나가이 박사의 부친이 바로 김성수가 존경하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와세다 대학에서 가르친 경험도 있는 중의원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역시 부전자전인 셈이다.
일본으로서는 최악,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네 번째로 큰 대지진, 그 뒤를 이은 쓰나미로 몇 만 명이 목숨을 잃고 50여만이 이재민이 된 가운데 설상가상이라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20킬로 이내의 사람들만 아니라 일본 전역이 핵 방사물질의 위협에 떨고 있는 가운데서도 질서를 유지하고 대단한 인내심을 보이고 있는 일본 사람들에 대해 들으면서 내가 만나본 일본 사람들이 생각난다.
BBC의 한 보도에 의하면 어떤 술가게가 파괴되어 길바닥에 정종 병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도 한 명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된 휘발유나 생필품을 사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면서도 불평 하나 없이 순번을 지킨다는 성숙된 시민정신은 외국보도기관들의 칭찬을 받기에 족하다. 물론 위기가 길어질수록 일본 사람들 중에서는 새치기를 한다든지 자리다툼으로 주먹다짐마저 벌어지는 현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속 염치와 예의를 지킬 것이라고 보이는데서 일본이 민도(民度)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비슷한 재난이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닥쳤다고 가정해 볼 때 일본인들이 1주일 이상 보여준 인내심과 질서를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기야 평소에도 권총강도 등 범죄가 빈발하는 사회에서 극한 상황 아래의 혼란과 무질서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권위에 대한 복종심이 강한 것이 장점인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 시적의 전쟁 중 일본 군인들이 천황 및 상관들에게 대한 절대 복종의 한 단면이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포로수용소에서의 전쟁 범죄로 표출된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위험할 수도 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이 인권 존중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만 남용되지 않을 것이다.
또 1923년 관동 대지진에 죽은 14만의 피해자들 가운데는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라는 유언비어에 속아 흥분한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을 죽창으로 살해한 숫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거짓말의 돌이킬 수없는 위험과 피해도 위기상황에서 예방해야할 독소이다.
피해자의 유가족들과 이재민들이 안정을 회복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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