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샤론의 장미’(Mugunghwa: Rose of Sharon)의 꽃은 바이얼리니스트 제니퍼 고(34·Jennifer Koh)였다. 작곡가 마크 그레이가 “제니퍼를 위해 썼다”고 했을 만큼 바이얼린 선율이 중요한 이 곡은 제니퍼 고만이 낼 수 있는 음색으로 기쁨과 슬픔, 분노와 절망, 광기와 염원 등 인간 감정의 모든 기복을 표현하며 청중을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갔다. 공연이 끝난 후, 리셉션에서 만나 연주가 만족스러웠느냐고 묻자 그는 혼곤한 얼굴로 “너무 곡에 몰입돼서 연주해 아직도 음악에서 풀려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새로운 곡을 연주할 때 제니퍼 고는 전 심장과 혼을 투자한다’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평 그대로였다.
열정과 집중의 바이얼리니스트,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티스트, 지적이고 과감한 솔로이스트, 비평가와 청중을 모두 만족시키는 연주자, 듣는 사람의 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연주자… 조용한 미소 뒤에 엄청난 파워를 지닌 제니퍼 고는 현대작곡가들의 신곡을 자주 초연하는 연주자로 유명하다. 그런가하면 ‘바흐와 그 너머’(Bach and Beyond)란 프로그램을 창설,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잇는 특별한 시도로 호평받고 있는 그는 음악과 사람을, 음악과 역사를, 음악과 음악을 연결하는 의식 있는 음악인이기도 한다.
제니퍼 고를 ‘무궁화’ 공연 이틀 전인 지난 4일 인터뷰했다. 작년 10월 세리토스 퍼포밍 아츠 센터에서 모스크바 스테이트 심포니와 브루흐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협연했던 그는 오는 5월24일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존 애덤스 지휘의 LA필하모닉 뉴뮤직 그룹과 함께 4개의 현대곡을 세계 초연하고, 9월15일에는 할리웃 보울에서 베토벤 트리플 콘첼토의 협연자로 나서는 등 남가주 음악팬들과 자주 만날 예정이다.
많은 신곡 초연, 어렵지만 어머니 생각하며 최선
‘바흐 프로그램’통해 세대 연결하는 연주하고파
6일 열린 LA 매스터코랄의 ‘한국 이야기’ 콘서트에서 제니퍼 고가 ‘무궁화: 샤론의 장미’를 협연하고 있다. <이은호 기자>
-‘무궁화: 샤론의 장미’는 어떤 곡인가.
▲굉장히 파워풀하고 감동적인 음악이다. 특히 우리 부모들의 스토리가 담긴 곡이고, 나의 음악 언어가 담긴 곡이라 내게는 무척 특별한 공연이다. 한국과 한국인에 관해서 주류음악계에서 쓰여진 곡도 없고 연주한 적도 없기 때문에 친구들이 굉장히 흥분돼 있다. 나의 음악이 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다.
-굉장히 어렵다고들 하는데.
▲굉장히 인상적인 곡이다. 합창과 앙상블이 함께 연주하면서 놀라운 커넥션이 일어난다.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위대한 곡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감정을 일깨우고 듣는 사람을 감정적으로 정화시킨다. 어려운 곡이긴 하지만 워낙 현대음악 연주를 많이 해봐서 특별히 힘들진 않다. 음악이 놀라운 것은 연주가 끝나는 순간 음악은 사라지지만 그것을 들을 때의 느낌이 우리 모두를 연결시키는 경험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스토리가 담긴 곡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의 개인적 유산, 현재의 나와 연결된 곡이다. 이 곡에는 우리 부모를 비롯해 전쟁을 겪은 모든 한국인의 삶과 고통이 들어 있다. 나의 어머니는 30달러를 갖고 미국에 와서 엄청나게 고생하며 일한 결과 박사학위까지 취득해서 평소 꿈꾸던 교수가 되셨다(어머니 거트루드 순자 고씨는 일리노이주 도미니칸 유니버시티의 도서정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민자 가정에서 음악인이 나오려면 3세대가 걸린다고들 한다. 1세대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2세대는 교육을 시키며, 3세대에 가서야 음악가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는 1세대와 2세대를 하나로 압축시킴으로써 내가 뮤지션이 될 수 있었다. 나를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하신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 공연은 어머니의 이야기이고, 어머니를 축하하는 공연이다.
-혹시 이번 콘서트에 어머니가 오시는가.
▲어머니가 시카고에서 오셔서 연주회에 참석하신다. 무척 설레고, 긴장되고, 또 기쁘다.
-자신이 한국인인 것이 중요한가.
▲그런 것 같다. 한국인인 부모님에 의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으니까. 내가 자랄 때는 주위에 한인들과 한인 커뮤니티가 없었지만 지금은 한인들의 서포트가 너무 감사하다.
-신곡 초연을 많이 하는 연주자로 유명하다.
▲다른 바이얼리니스트에 비해 현대음악을 많이 하는 편이다. 5월에 디즈니 홀에서 있을 콘서트에서는 작곡가 미시 마졸리가 바흐의 성요한 수난곡에서 영감을 얻어 쓴 새 곡을 연주한다. 이 곡은 나를 위해 위촉된 곡이다. 또 4월엔 런던에서 BBC 오케스트라와 진은숙의 곡을 연주하는데 이것 역시 굉장히 어렵다. 어려운 신곡을 연주할 때면 어머니의 삶, 역경을 헤치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오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도 열심히 일한다.
-‘바흐’ 프로그램 등 클래식 역시 많이 연주하는데.
▲나는 세대를 연결하는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엄마와 할머니와 손자손녀로 이어지는 전체의 삶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나의 음악이다. 과거의 음악을 현재와 연결해 미래로 데려가는 것, 전 세대를 관통하는 풀 서클을 보여주고 싶다.
-음악만 하지 않고 영문학을 전공한 것이 특이하다.
▲바이얼린은 세 살 때 시작했는데 자라면서 모든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예술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호기심 아닌가. 특별히 문학과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이번 ‘무궁화’도 가사와 언어가 중요한 곡이다. 오벌린 대학 1학년 때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입상하자 사람들은 모두 이제 바이얼린만 하라고 했지만 나는 다른 것들을 더 배우고 경험하기를 원했다. 내 인생 전체를 그려보면서 우선 대학 4년 공부를 마치고 음악은 그 후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방학이나 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바이얼린을 열심히 했다.
-악기는 어떤 것을 쓰고 있나.
▲1727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대여받아 연주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 좋은 명기를 쓰고 있는데 소리가 정말 좋다. 연주할 때면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소리를 낸다. 너무 비싸서 아직은 사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최근 남가주에서 연주가 많은데 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번 ‘무궁화’ 공연을 위해 애써 주신 한국일보와 한인들에게 너무나 감사드린다.
■제니퍼 고는
시카고 인근 글렌엘린 출생, 199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2위를 차지해 세계 음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후 콘서트 아티스트 길드 콩쿠르,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 등을 수상하며 열정적인 연주로 관객을 사로잡아왔다. 오벌린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커티스 음대에서 수학한 후 99년 카네기홀에 데뷔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 폴리시 챔버 오케스트라, BBC 런던 심포니, 디트로이트 심포니, 신시내티 심포니, 샌디에고 심포니,
뉴월드 심포니,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시카고 신포니에타, 헬싱키 필하모닉, 모스크바 라디오 심포니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왕성한 연주활동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지 못하는 환경의 아이들과 학교를 찾아 순회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예술계 고등학생을 위한 장학재단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www.jenniferk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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