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던 책 아운데 ‘역사의 종언’이란 게 있다. 하버드 출신의 국무부 관리를 지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이 책은 역사상 수많은 체제가 등장했지만 그 최후의 승자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며 이제 사실상 이념간의 우월을 가리기 위한 투쟁은 끝났으며 그와 동시에 역사도 종언을 고했다고 주장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나온 이 책은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본 명저’라는 찬사에서 ‘냉전의 종식을 역사의 종언으로 오해한 작품’이란 비판까지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됐다. 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고 민주주의 체제가 확산되면서 정설로 굳어지는 것 같던 이 책의 주장은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 테러가 미국을 강타하면서 함께 타격을 입었다.
대표적인 미국 평론가의 하나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역사의 종언의 끝’이란 글을 썼고 조지 윌도 ‘역사, 휴가에서 돌아오다’라고 비판했다. 후쿠야마의 대학 시절 은사인 새뮤얼 헌팅턴은 동서 냉전이 끝나면서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문명 간의 충돌이 시작됐다는 취지의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문을 써 후쿠야마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이 수렁에 빠지자 자유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문명 충돌론’이 최근까지 설득력을 얻어왔다.
그러던 차 올 들어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필두로 소위 ‘재스민 혁명’이 터졌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이미 독재자가 물러났고 리비아의 카다피 운명도 풍전등화와 같다. 지금까지 진행 과정을 보면 북아프리카 아랍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이란이나 알카에다가 부르짖는 회교 신정 독재 체제가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는 민주주의다.
물론 민주화 혁명의 진행 과정이 지지부진하고 민주화를 달성한 후에도 국민들의 고픈 배를 채워주는데 실패한다면 다시 회교 극렬분자들이 날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는 회교권이라고 반드시 독재를 해야 하고 민주주의가 싹틀 가능성은 없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실 중동에서 이란을 제외하고 회교 독재가 성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이란도 국민들이 정말 이를 원하고 있다기보다는 팔레비의 실정에 분노한 국민들이 봉기한 틈을 타 회교 신정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후 폭력으로 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관찰이다. 지난 번 대선 때도 공정한 선거가 이뤄졌다면 아마디네자드가 다시 집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후쿠야마의 결론이 옳았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게 된다. 아직도 회교권과 중국, 러시아 등 많은 곳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지만 이번 ‘재스민 혁명’을 계기로 무너지지 않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도자들도 정치 개혁과 민주주의를 약속하고 있고 러시아와 중국도 명분으로는 민주주의를 내걸고 있다.
복잡한 이론은 그만 두고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평생 남의 노예가 돼 살고 싶은가’ 묻는다면 노예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정신병자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에 관해 가장 잘 쓴 글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근대 이후 세계사의 가장 큰 흐름을 평등주의의 확산이라고 봤다. 인간 평등의 사상이 대세라 한다면 민주주의의 확산도 필연이다. 민주주의만큼 평등의 원리를 잘 실현할 수 있는 제도는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중동에서 문명이 시작된 이래 역사는 직진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 로마의 영화 뒤에는 중세의 혼란과 퇴보가 있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아직까지는 한 보 후퇴 뒤에는 두 보 전진이 이어졌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인간의 갈망보다 강한 힘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일고 있는 격랑은 역사의 전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산고라 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