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이던 젊은이들이 폭도들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들의 반독재 가두데모는 폭동이라고 표현되었다. 1960년 봄의 한국 사태에 대한 이야기다. 3.15 정·부통령 선거가 자유당의 원천적인 부정으로 이승만, 이기붕의 당선으로 끝나자 마산 등지에서 학생들의 데모가 벌어졌다. 경찰의 진압 과정은 무자비했다. 눈에 박격 포탄이 박힌 채 발견된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부두 해변에 떠오르자 서울에서도 4월18일 고대생들의 데모가 벌어졌고 경찰의 대응으로 안암동, 신설동 부근에는 최루탄의 연막이 자욱했다. 경찰의 과잉 진압과 학생들에 대한 일부 정치 깡패들의 구타 행위는 그 다음날 4월19일의 대규모 데모를 유발하게 되어 각 대학의 학생들만이 아니라 고등학생들마저 서울 도심으로 집결하게 된다. 경찰이 계속 최루탄을 쏘아 대고 곳곳에 바리케이드도 설치해 놓았지만 성난 파도처럼 달려오는 수만 명의 청소년들 앞에서는 아무 효과도 없었다. 세종로로 몰려들어 경무대가 있는 효자동 쪽으로 행진하면서 계속 대통령의 하야까지 요구하는 상황에 경찰은 전점 후퇴하여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의 장관 관사들 부근으로 방어진을 옮겼다. 이미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사는 불탔고 자유당 당사도 마찬가지였다. 경무대가 거의 문전에서 함성을 높이던 데모 대원들에게 갑자기 경찰의 실탄 공격과 진압이 시작되었다. 짧은 시간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총기에 맞아 죽고 더 많은 수가 부상당하는 피의 거리로 변모됨에 따라 골목골목으로 숨어 달아나던 학생들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바로 현장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견습기자 시절이었는데 외신부 소속이라 데모 취재와는 관련이 없었지만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려는 심산으로 데모대의 앞장 부근에 서성거렸기에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쓰러진 학생들이 동료들에 의해 효자동, 내자동 부근의 이 병원 저 병원에 옮겨지는 것을 따라 다니며 부상자들의 학교와 성명을 물어 사회부 데스크에 전화를 하면서 최루탄 연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의 희생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마침 내 아버지께서 작고하신 날이 그 전 해의 같은 날이었다는 우연의 일치에 더 서러웠던 기억이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탱크가 서울 요소요소에 배치되었지만 계엄군들이 학생을 체포하는 일은 전혀 없어서 여학생들이 군인들에게 꽃을 달아주기도 했으며 서울 주둔 계엄사령관 조재미 준장이 시민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던 생각이 난다.
자유당 정권이 계엄령으로 사태가 수습되고 안정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빗나갔다. 계엄령 아래서도 4월26일에는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의 데모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고 그로부터 며칠 안 되어 미국 대사 매카나기가 경무대로 이승만을 방문하여 하야를 권했다.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 하겠다”라는 성명과 함께 혜화장으로 이사했다. 그 무렵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과 그 가족은 피신의 길이 막히자 이승만의 양자이기도 했던 이강석이 자기 부모와 동생을 사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들어선다. 이승만을 단죄하자는 일부 주장도 있었기 때문인지 5월말에는 하와이의 부자 교포 필립 최가 비행기를 전세 내어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를 하와이로 망명시킨다.
3.15 부정선거 원흉으로 한희석, 장경근, 최인규, 홍진기 등 자유당 중진들과 장관들이 체포되어 사형선고 등 극형을 선고 받았지만 부정선거 때는 내무장관이었다가 4.19 때는 법무장관으로 있던 최인규만 사형이 집행된다. 또 자유당 때 정치 깡패 두목들로 야당 의원들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이정재와 임화수도 사형된다. 그리고 4.19 발포 책임자로서는 경무대 경호실장이던 곽영주가 사형된다.
이집트의 1.25 혁명으로 무바라크가 하야할 것을 거절하여 데모가 가열화 되던 중 11일에 결국 하야하고 망명한 것을 보면서 불안전한 기억이지만 4.19와 비교를 해 본 것이다. 4.19가 곧 폭동에서 의거로 바뀌고 또 혁명으로 바뀐 기억이 나며 민주당이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집권을 했지만 대통령 윤보선의 구파와 국무총리 장면의 신파 사이에 끊임없는 정쟁과 사회 불안으로 1년도 못 되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맞게 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적어도 경제만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볼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어 한국이 세계 경제 대국 제 11위에 오르는 발전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집트의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집트의 군부가 1952년 이래 권좌의 배후에 있어왔던 연고로 부정부패가 만연한데다가 인구 8천만 중 반 이상이 하루에 2달러로 생활한다는 경제적인 빈곤을 극복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