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대패한 직후 백악관엔 비상이 걸렸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오바마 자신이었다. 당 차원을 넘어 개인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즉시 회복전략 모색에 착수한 참모들이 내린 주요 결론 중 하나는 진흙탕 싸움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바마가 누구인가. 워싱턴의 양극화된 대립의 시대를 끝내겠다고 약속하며 당선된 ‘변화의 사도’였다. 그런데 지난 2년 워싱턴의 당쟁은 더욱 악화되었고 기본 예의조차 실종된 이전투구의 한복판에 그가 서있는 것이다.
민주-공화 양당의 원색적인 싸움에서 한 단계 높은 곳에 서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그건 중도로의 선회를 뜻하기도 한다.
‘뉴욕 매거진’은 심층보도를 통해 지금 백악관 내부에선 향후 2년을 과거 2년과는 다르게 전면 개선할 포괄적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전한다. 민주당 한 인사는 지난 2년 ‘백악관은 폐쇄회로였다”고 비유했다. 오바마 사단의 소수만이 대통령과 소통하며 사실상 전 행정부를 운영해온 것이다. 대통령의 전화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장관이 대여섯명이나 되었다.
전면개편은 오바마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선거참패 후 깊은 자기성찰에 들어갔던 오바마는 리셋 버튼을 누르기로 결단을 내렸다.
소수 측근의 배타적이었던 ‘그들만의 서클’을 깨고, 보다 폭넓게 외부와 내부의 조언을 수용할 방침이다. 그러려면 내외 인사들과의 사적인 식사와 전화도 잦아져야 한다. 그동안 오바마는 민주당 인사들과의 만남도 사적으로는 될수록 피해왔다. 만나서 밥 먹고 골프하면 초당적 합의도 훨씬 쉬워진다는 원로들의 조언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JP모건 출신의 윌리엄 데일리 비서실장이 입성하고 지난 10년 늘 오바마의 곁을 지키며 가족 같았던 선임고문 데이빗 액셀로드와 대변인 로버트 깁스가 이달 말 백악관을 떠나면서 인사에도 대폭 물갈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회복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그 첫 번째가 공화당과의 협상으로 부시감세조치 연장안을 통과시킨 레임덕 회기다. 부유층의 감세를 허용, 진보진영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도 들었지만 계속 공화당과 타협에 성공하면서 사상 가장 생산적인 레임덕 회기 만들기에 한 축을 담당했다. 초당적 리더로서의 터를 닦은 것이다.
투산 총기난사사건 희생자 추모연설로 국민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 두 번째 기회였다면 세 번째 기회는 25일의 국정연설이었다.
전문가들은 가장 중요한 적자해소의 구체적 대책제시가 빠져있다고 비판하지만 일반국민들에겐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연설이었다. 1년 전 불안했던 오바마의 입지도 훨씬 좋아졌다. 지난 한달여는 지지도 급증과 경제지표 향상으로 “오바마 집권후 최고의 6주”로 꼽힐 정도다.
연설의 주제는 요즘 백악관 참모들이 즐겨 쓴다는 “winning the future”, 미래를 우리 것으로 만들자는 의미다. 교육투자와 혁신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 미래를 미국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강조한 이 주제는 새롭게 출발하는 오바마 후반기의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2년 워싱턴을 뜨겁게 달굴 논쟁의 초점을 문제의 책임을 추궁하던 ‘과거’에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타협할 ‘미래’로 바꾸자는 의미도 함축되었다. ‘경기침체’도 ‘경기활성화’로 바뀌었다.
오바마는 “중요한 것은 누가 당선될 것인가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지만 2012년 대선의 그림자는 곳곳에서 어른거렸다. 연설의 내용은 ‘초당적’이었다.
새로운 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한편 5년간의 예산동결을 약속했고, 군 동성애자 차별금지 입법에 찬사를 보내는 한편 많은 대학이 폐지시킨 캠퍼스내 ROTC 모병소 부활을 촉구했으며 법인세 인하 등 친기업 정책과 함께 석유기업 보조중단을 다짐했고 헬스케어개혁법 폐지는 반대했으나 수정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양당 모두 배려했지만 양당 모두에서 불만이 터져나오는 이번 연설의 주 대상 유권자는 누가 보아도 무소속이다. 중간선거에서 등 돌렸던 그들에게 처음 약속했던 대로 초당적 리더가 되기 위해 실용적 중도노선을 택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승패는 공화당과의 협력에 달렸다. 오바마와 공화당 모두 원하는 목표는 같다. 경제성장과 적자해소다. 방법이 다르다.
첫 시험대는 다음달 예산 전쟁이다.
5년의 예산동결을 통해 1년에 400억 달러씩 감축하는 오바마의 적자대책으론 어림없다며 공화당은 1년에 1천억 달러 감축을 주장한다. 오바마는 ‘투자’를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자고 하고 공화당은 ‘지출삭감’을 통해야만 성장한다고 맞선다. 아직 양쪽 모두 구체적 대책은 밝히지 않았다.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스타일도, 노선도 새롭게 바꾸고 새로운 로드맵을 들고 후반기를 시작하는 오바마의 발걸음은 지난해보다 훨씬 가볍고 당당해 보인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성장시켜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금년부터는 공화당과 함께 나눠서 지게 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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