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 연방상원의원 버락 오바마를 세상에 알린 것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스피치였다.
“진보적 미국과 보수적 미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 (단합된) 미국만이 있을 뿐입니다…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 라티노의 미국, 아시안 미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단합된 미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념과 인종을 뛰어넘는 초당적 화합은 오바마가 그 후 대선 캠페인에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강조한 공약이었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그의 재임 2년간 초당적 합의는커녕 양극적 대립은 계속 악화되었다. 거친 분노와 증오를
‘표현의 자유’로 착각하며 아무데서나 아무에게나 무례한 독설을 뱉어내는 것이 요즘은 연방, 지방 할 것 없이 미국 정치문화의 낯익은 단면으로 정착했다.
지난 주말 애리조나 주 투산에서 발생한 총기난사사건은 오바마에게 오랫동안 미루어 온 이 공약을 실현시킬 기회를 주고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사건의 정확한 동기를 알지 못한다. 민주당 연방하원의원 가브리엘 기퍼즈가 주민들과 가진 평화로운 만남의 장소에 왜 중무장한 제러드 러프너가 뛰어들어 무차별 난사로 기퍼즈에게 중상을 입히고 6명을 숨지게 했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정확한 원인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조사 중 흘러나온 사실과 추측이 뒤섞여 현재 수면에 떠오른 사항은 세 가지다.
첫째, 비정상적인 행동과 마약문제로 경찰에 5차례나 체크당한 러프너는 정신건강 치료가 무엇보다 필요했던 청년이었다. 애리조나도 재정난에 시달리는 다른 주들처럼 정신건강서비스 예산을 대폭 삭감해서일까, 러프너가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둘째, 러프너는 망상에 사로잡힌 반정부 성향이 곳곳에서 드러난 정신질환자로 마약사용자였지만 총기관련법은 그가 강력한 살상무기인 반자동 권총을 구입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 느슨했다. 이처럼 쉽게 총을 손에 쥔 정신이상 청년이 20명의 사상자를 낸 무차별 난사를 감행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드러난 사실이다.
반정부 서적들을 탐독했다는 것 뿐 러프너가 어떤 정치이념에 집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셋째, 호전적 언행으로 선동하며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온 독설 정치의 책임론은 추측일 뿐 이번 사건과는 무관한 것일까.
사건발생 후 내내 비난의 표적이 되어온 극우파의 기수 새라 페일린의 반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독설정치풍토의 책임은 아무래도 극우보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절제한 독설이 어떤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당한 것은 1901년이었다. 박람회장에서 주민들과 악수를 나누던 중 저격을 당했다. 여론의 비난은 곧장 대선출마를 다지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에게 쏟아졌다. 6개월 전 그의 소유인 뉴욕저널엔 이런 내용의 칼럼이 실렸었다. “…나쁜 제도와 나쁜 사람들을 죽여야만 제거할 수 있다면 죽여야 한다” ‘나쁜 사람’이 허스트의 정적인 매킨리를 지칭했다는 것은 만천하가 알고 있었고 암살은 현실로 나타났다. 암살범은 자신이 무정부주의자라고 주장했으나 뉴욕저널은 공범으로 매도당했고 허스트의 대권야망도 함께 무너졌다.
저격당한 기퍼즈를 포함, 낙선시켜야 할 민주당의원들의 지역구를 총구의 과녁으로 표시해 작성한 페일린의 ‘과녁지도’는 사건 발생 후 더욱 섬뜩한 느낌을 준다. 과녁지도를 페이스북에서 급하게 없애는 것에 그치지 말고 페일린도 이제는 그 명성에 걸맞게 보다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야 할 때다.
주정부의 재정난으로 허술한 정신건강관리를 조속히 개선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공화당이 소명으로 여기는 총기소유권을 약화시키는 어떤 규제도 쉽게 입법화되지 못할 것이다.
양당의 지도부가 노력한다면 막말이 난무하는 정치풍토는 약간 개선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오바마가 중도로 나아가며 손을 내밀고 공화당의 존 베이너 연방하원의장이 마주 나가 그 손을 잡는다면 최소한 얼마동안만이라도 ‘타협의 정치’는 실현될 수도 있다.
연방의원과 판사 등 성실한 공직자들이 저격당하고 민주주의를 배우려던 초등학생이 무고하게 숨진 참극을 목격하며 충격에 빠진 미국민들은 지금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기대에 찬 관찰의 시선이다. 슬픔을 달래주는 따뜻한 위로를 받고, 고통을 함께한다는 공감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어떤 비극도, 불안도 우린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 기대한다. 그건 위기 대처능력에 대한 시험일 수도 있다.
어제 투산으로 날아가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한 오바마는 두 딸의 아버지다운 다정함으로 9세 소녀 크리스티나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치색을 배제한 위로를 전하는 한편 지금은 상처 주는 비방을 멈추고 “서로를 치유해야 할 때”라며 단합을 호소했다.
난관에 직면한 개인이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하듯이 대통령의 위로를 들으며 미국은 잠시 손을 맞잡고 ‘하나의 국민’임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 순화된 성찰의 시간을 통해 극단으로 치달아온 반이민정서도 가라앉기를…” 지금은 우리에게도 상처치유에 동참할 시간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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