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리가 내린 뒤뜰에는 거짓말처럼 나뭇잎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빈 가지들은 잎들을 떠나보낸 자리마다 쌀알만한 마디를 숨긴 채 가라앉은 공기 속으로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 겨울나무들에겐 잎을 달고 흔들리던 지난 시간들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겨울의 초입에 서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북풍을 견디는 일쯤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눕거나 일어서면서 혹한의 겨울을 무사히 건너간 뒤 봄이 오면 다시 푸른 이파리들을 산란해 놓으리라.
메밀꽃 같은 서설이 내린 지도 오래이고 초빙을 얼려 놓은 지도 여러 날, 겨울은 오로지 깊어가는 것만이 제 할 일인 냥 우물 속처럼 깊어만 가고 있다.이런 날은 커피 한잔이 생각난다. 카페인에 자주 점령을 당하면서도 나는 번번히 몽클하게 짙은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 머신에 불을 켜고 조록조록 떨어지는 커피를 눈과 코가 먼저 맛보고, 다음으로 커피잔을쥔 손이 향기를 읽는다. 그리고 빙점 이하로 내려간 겨울의 냉기와 텅 빈 뒤뜰의 풍경에 연계된 커피의 맛이 가장 나중으로 가슴에 짙게 퍼진다. 겨울 아침에 마시는 한잔 커피는 특별한 온기를 지닌 따뜻한 언어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니 이미 졸음이 깊다. 겨울시간으로 바뀌면서부터 전화통화하기가 쉽지 않다. 작년 이맘때는 아버지와 통화하며 추웠던 겨울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몇 편의 글을 쓰기도 했었는데 거짓말처럼, 올 겨울엔 그 아버지가 안 계시다. 아버지가 세상의 문패를 떼어내시면서 혼자가 되신 어머니는 실버타운으로 옮겨졌다.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 해도 분명한 건 혼자 계시다는 사실이다. 두 분의 삶은 이 땅의 모든 부모가 그랬듯이 자식들을 좀더 나은 문명의 불빛 속으로 합류시키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사셨었다. 그리고 그 불빛 밝은 세상으로 떠난 자식들은 제각기 바쁘다.
어머니가 사시는 곳엔 숱한 이야기들이 있다. 전화를 걸면 어머니는 그곳의 이야기를 어눌한 발음이지만, 소상히 전해 주신다. 그곳엔 어머니처럼 반편의 몸이 성치 못한 분들과 치매를 안고 사시는 분들이 많다. 삶이라는 전쟁터를 건너오며 몸이 고장 나고 맘이 고장 나, 파편처럼 박혀 있는 기억의 조각들만을 안고 사시는 분들의 이야기는 가엾기만 하다. 날만 저물면 냉장고의 물건들을 죄다 끌어내어 이불을 덮어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이야기나 밤마다 보따리를 품에 앉고 고향으로 갈란다고 한차례씩 소동을 벌인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애닯다. 이미 제 갈 길로 다 떠나버린 자식들을 위해 아직도 더운 밥을 묻어 두며 저물 녘의 시간에 갇혀 계신 할머니와 날마다의 막차가 떠난 걸 확인하고 첫차를 기다리며 아이처럼 잠이 드는 할머니의 일상이 애처롭다.
나의 어머니는 어디쯤의 시간에도 갇히지 못한 채 겨울을 나고 계시다. 어머니란 대명사는 가난한 부엌에서 요술처럼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고 시들어가는 텃밭의 채소 한 잎에도 다시 호흡을 불어 넣어 주시던 그런 분의 이름이 아니던가. 한숨 자고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이 드신다는 어머니는 오늘도 한밤중에 깨어 성성하던 날들의 부엌이나 텃밭쯤에 앉아 계신 건 아닌지. 하이타이 흰 거품을 날리며 삶은 빨래를 벅벅 문지르던 젊은 날의 수도간에 앉아 계실 수도 있고 그 빨래 줄 밑에 뛰어 놀던 어린 것들의 부드럽던 머리칼을 떠올리며 쓸쓸한 기억의 포구를 헤매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런 쓸쓸한 포구를 혼자서 걸어야 하는 날들이 찾아올 것이다. 푸르던 것들이 쇠하여지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고서야 기억을 잃은 자의 허망함을 알 수 없고 성한 몸을 가지고 있을 동안은 성치 못한 자의 무거운 육신을 가늠할 수조차 없으리라. 홀로 남겨진 어머니 때문에 형제들은 모두 이 겨울의 밤바람 소리를 모로 누워 듣는다고, 모로 누워 자는 자들의 불편함들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반편의 어머니를 차지하겠다고 나서지 않고 있다. 푸르고 성성하던 어머니의 몸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그 팔을 나누어 베겠다고 자리다툼을 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고장 난 육신을 가진 어머니는 실버타운 깊숙한 곳에서 홀로 겨울을 나고 계시다.
오랜만에 차이코프스키를 듣는다. 겨울 아침에 듣는 안단테 칸타빌레는 커피 맛처럼 은근하게 가슴으로 스며든다. 프랑스의 문호 테레랑은 커피의 맛을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고 했던가. 졸음 깊은 어머니와의 짧은 통화를 끝내고 혼자 마시는 커피가 취기처럼 온몸으로 퍼진다. 이 아침 숱한 사람들이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하루를 시작하리라. 커피 한잔을 뽑으려면 백 개 가량의 커피콩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 커피 한잔 분의 커피열매를 팔고 커피농부의 손에 쥐어지는 돈은 고작 1센트이며 나머지는 모두 거대 커피회사와 중간수출입업자들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허다한, 평형을 잃은 배분의 법칙 중 하나인 커피의 진실과는 상관없이 날마다의 세상엔 비싼 커피가 새로이 등장하고 있다.
내가 커피를 처음 맛본 건 중학교 신입생이 되던 봄날, 대문간의 목련 두어 송이가 꽃잎을 내어 놓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이미 다른 집들을 들러오신 선생님은 어머니가 내 놓으신 다과상에서 홍옥 한 조각을 입에 대셨을 뿐, 커피는 손도 대지 않으셨다. 선생님이 자리를 뜨시고 나서 맛본 나의 첫 커피 맛은 설탕을 듬뿍 넣은 달콤한 맛이었다. 그날 붉은색 체크무늬 월남치마를 입고 대문간 밖에까지 담임을 배웅하시던 내 어머니는 수줍고 촌스러웠지만 건강하고 고왔었다. 그 고왔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이 밤, 혹시 도시를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 소리에 깨어 기억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계신 건 아닌지. 혼자서는 돌아누울 수도 없는 어머니의 창문을 눈치 없는 겨울바람이 흔들고 지날까 염려가 된다.
뒤뜰 홍가시나무에 찾아오던 붉은 로빈 새 부부가 보이지 않는다. 가끔 나뭇가지에 찔러 놓은 빵 조각을 톡톡 쪼아 먹으며 기웃기웃 갸웃갸웃, 나를 쳐다보곤 했었는데, 이 겨울 어디로 간 것일까. 온기가 전해지는 커피잔을 감싸 쥐고 있으니첫사랑과 함께 찻집에 자주 드나들던 날들이 생각난다. 커피와 첫사랑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생각만으로도 따뜻해지고, 다시 그리워지고 때로는 잠 못들게 하기도 했다.
음악다방 한쪽에 앉아 린다 론스테드의 롱롱타임이나, 호세 펠리치아노의 원스 데이 워즈 어 러브를 들으며 마시는 비엔나 커피는 부드러웠다. 애절한 음악과 아이스크림을 얹은 달콤하고도 쌉쌀한 커피 한잔을 곁들여 건너다보는 사랑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라디오의 별밤지기도 문을 내린 겨울 밤, 잠 못 들어 창문을 열면 차갑게 얼어 있는 하늘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별들만이 몇 개 흩뿌려져 있었다. 들숨을 쉴 때마다 이마 가까이로 다가오던 그 겨울하늘의 맑고 짱짱했던 공기는 아직도 코 끝에 남아 있는듯한데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은 저만치 멀리 가있다.
어머니의 창가에도 좁쌀 같은 별들이 떠 있을까? 그 별들 너머 이방의 나라, 적요한 아침공기 속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딸의 존재를 느끼실까? 분주했던 청춘도, 고달팠던 젊은 날도 새벽 기운에 밀려나는 별처럼 부질없이 빛나던 것이었음을 깨닫는 건 아니신지. 그리하여 오소소, 삶의 한기를 껴안으며,생각을 모로 눕히시며, 다시 잠을 청해보시는 건 아닌지. 나는 너무 먼 나라의 아침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다.
(pinkmd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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