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떠나기 전 나는 전북 익산에 있는 남성 고교가 추진해 온 특목고 지정이 새로 선출된 교육관에 의해서 무효화돼 행정소송이니 어쩌니 하는 시끄러운 기사를 읽었다. 또 얼마 전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맡아 왔던 길상사가 뉴스에 나오는 바람에 민 충정공에 대한 생각이 새로워지면서 이번 서울에 가면 길상사를 한 번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소위 왜정시대에 안타깝지만 애국 의사 안모의 아들같이 왜놈의 개가 되어 아비를 망신시켰다고 한탄을 받을 만큼,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이 겪은 일본놈들의 회유, 협박, 모략으로 그 인격적 타락을 시키려는 공작은 설명이 안 될 만큼 대단했었다.
그러한 환경 때문인지 민 충정공 자손들이 일본에서 대준 돈으로 불란서 유학 간답시고 해외로 가서 주색잡기로 패가망신했다고 잘못 아시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3형제 아들들이 왜경의 핍박, 회유 속에서 잘들 곤경을 이겨내고, 민 충정공 손자, 손녀 대에 이르러서 모두들 훌륭한 삶을 영유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아주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근검과 그러면서도 인자하신 충정공 둘째 며느리의 얼굴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바로 그분의 따님하니까 충정공의 손녀딸이 바로 남성고와 길상사와 인연이 있다.
조선조 말 고종시대에 전북 전주 출신으로 수원 백씨 락신이란 만석꾼 부자가 있었다. 그는 경복궁 재건 때 대원군에게 거액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학란 때 고종이 “너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하면서 이름을 남쪽이란 남(南)자에 믿는다는 신(信)을 써서 이름을 백남신이라고 고치게 하고 전주에 진위대란 벼슬을 주었다. 동학란이 끝나고 백남신이 입신양명은 더할 나위도 없었으리라.
그 후 소위 을사보호조약의 격변기에 정치에 손을 떼고 쌀장사로 나서 백남신과 또 그의 아들 백인기하면 전라도의 최고의 부자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바로 백남신의 아들 백인기의 부인 이춘기씨가 세운 학교가 남성고이며, 백인기씨가 여름 별장으로 지은 것이 현재의 길상사이다. 그리고 그 백인기가 충정공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이했으니 백남신의 손자와 민 충정공의 손녀로 서로 사돈이 된 것이다.
충정공 손자인 ○○형과 지나간 어려운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끝내고 길상사로 향했다. 가는 길 혜화동 입구에서 나의 혜화국민학교를 다시 보는 흐뭇함도 맛보았고, 길상사 가는 길목이라 간송 미술관에 먼저 들렸다. 마침 새와 꽃을 주제로 한 그림 특별 전시 프로그램으로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조 때부터 내려 온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에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화가 아드님, 매듭의 인간문화재 며느님의 특별 배려로 사저인 금지구역까지 들어가 백제탑, 백제시대 미륵불 등등을 볼 수 있는 영광도 누렸다. 거듭 소장품을 보면서 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기 위하여 일생을 보낸 간송 선생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길상사 옆 전시관에서 한국의 최고봉의 서예가들의 종합 서예 전시를 들러보고 마침내 길상사 문 앞에 섰다. 백부자의 여름 별장으로, 요정 정치의 상징으로 알려진 대원각으로 한 때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건물의 모습이나 건물의 배치가 어쩐지 처음부터 절로서 지어진 것 같았다. 마침 법정스님의 유작들인 서화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세상은 참으로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학부모들이 간송 미술관에서나 이 곳 길상사에서나 어린 아들, 딸들의 손을 이끌며 교육을 넘어 취미, 교양을 넓히며 인격 함양에 쏟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그저 좋아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길상사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이왕 이곳까지 온 터라 또 하나의 요정 정치의 상징인 삼청각으로 갔다. 그리고 옛 별당이 이제 라운지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앞이 탁 트이게 된 곳에 앉아서 국화차를 한잔 들며 황혼녘에 서울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사실 시멘트의 성냥갑 같은 아파트의 서울이라지만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등등의 공원 같은 곳이 있기에 아직까지는 그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는 것 같았다. 고려의 개경은 아니지만 또한 뜻도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왠지 야은 길재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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