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보내면서 올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들은 새해에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기와 네 살이 된 두 손자들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다행히 40분 정도 운전하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딴 주에 사니 고마운 일이다) 주말에 시간을 내 그들을 본다. 그런 날은 우리는 마치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몇 시간 동안의 손자들의 재롱은 일주일이나 이주일후 다시 만날 때까지 가끔 생각만으로도 우리에게 미소를 띠게 하며 잔잔한 행복의 여운을 전한다. 사람들이 어린 손자 손녀 얘기에 침이 마르면 ‘아무렴 그렇게 까지야’ 하던 우리가 어느새 그 짝사랑 상사병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조부모들처럼 무조건 자기 손자 손녀가 세상에서 제일 영리하고 어쩌면 천재일까 병에 걸린 나를 보고 친구들은 아이들이 태어나던 그 시간에 이미 오색의 프리즘 마법의 안경이 씌워지고 말았다고 한다. 세대 탓인가? 주위를 돌아보면 정말 요즘 아이들은 호기심도 많고 영리하며 풍부한 상상력에 기억력마저도 비상한 것 같다.
한 아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를 만나러갔다. 그런데 소가 되새김을 하느라 계속 입을 우물거리는 모습이 마치 무얼 먹고 있는 듯 했다. 소를 유심히 쳐다보던 아이는 갑자기 “할아버지, 소가 껌 씹는다. 나도 껌 줘”라고 하면서 울어대 당황한 할아버지가 우는 애 달래느라 혼이 났다는 얘기가 있다. 또 어떤 아이는 동네 목욕탕에서 가슴에 털이 많이 난 터키 남자를 보고 “할아버지, 저 사람 왜 털옷을 안 벗지요”라고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단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말들이 가끔은 엉뚱해도, 그 마저도 예뻐 보이니 어찌하랴. 또 4살 된 한 아이는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후 동네 여자 고등학생 베이비싯터에게 자기 저금통장에서 제일 큰돈인 5불짜리 한 장을 꺼내주면서 “야단 안치는 엄마를 그 돈으로 사다줄 수 있느냐”고 해서 웃었다.
우리 집 세 살짜리 큰 손자가 석 달 밖에 안 된 자기 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석 달된 아이도 뭐라고 입을 움직이던 모습은 아마 오래 기억할 것이다. 큰 애가 세 살 때 말을 제법 할 때쯤 멀리서 친척들이 와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때 나는 아이에게 “저 테이블 끝에 계신 아주머니에게 인사해”라고 했더니 한번 쳐다보니 멀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두 손가락을 세워 전화를 만들어 “안녕하세요?” 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 전화 거는 건 어찌 생각한 거야.
손자는 며느리가 잘 가르친 탓인지 문이 조금만 열려 있거나 닫혀 있으면 꼭 노크를 하면서 “들어가도 되느냐(Can I come in?)”고 묻고 우리가 오케이를 하면 들어온다. 그래서 어느 날 물었다. “너 왜 노크하고 들어오니?” 했더니 두 손바닥을 앞으로 펴면서 “프라이버시”라고 했다. 그래서 프라이버시가 뭐냐고 물었더니 “몰라요(I don’t know)”이다. 엄마가 일러 주었는데 잊었다 해도 세 살 먹은 아이한테 물어보는 나나.
참, 요즘 초등학생들은 쿠키를 잘 만드는 엄마도 좋지만 예쁘게 화장을 한 엄마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커서 집을 떠나고 무미건조하다 생각이 들 때 새로 태어난 가족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거기다 내 핏줄이라며 우리를 꼭 빼닮은 고물고물한 얼굴이 태어나던 날 우리의 세상 바라보는 눈은 정말 오색 프리즘 색깔로 바꾸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날 닮은 사랑스런 그 애들을 보고 또 보고 돌아서도 그립고 또 보고 싶으니, 마치 풋사랑에 마음 빼앗긴 연인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화초같이 예쁘다고 인화초(人花草)라고 했나 보다.
거기다 말까지 몇 마디씩 하면 감격해서 목이 메이고 이걸 바로 무조건 짝사랑, 내리 사랑이라고 하나 보다. 거기다 내 살붙이 라서 인가. 척척 달라붙는 정이 손끝에서 가슴으로 전해오니 어찌하리오. 나도 어느새 손자 둘 자랑하는 팔불출 할머니가 되었다. 부디 새해에도 또 오랫동안 그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잘 자라주기를 빌어본다.
이혜란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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