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점가는 요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때문에 난리다. 지난 5월 나온 뒤 지금까지 62만부가 팔려 올해 출판된 책 가운데 최고 기록을 세웠는데 인문 과학 도서가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것은 한국 출판 사상 처음이다. 요즘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읽지 못하면 대화에 끼지 못 할 정도라고 한다.
정의를 다룬 책이 이처럼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6.25직후 당장 하루 끼니가 없던 세대들에게는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제 발전 이상의 미덕은 없었고 이런 국민의 여망에 부응한 것이 박정희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다.
그 결과 굶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국민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열망은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폭발했고 박정희를 능가하는 전두환의 철권통치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실현으로 나타났다.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라는 두 토끼를 잡은 한국민들은 그래도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를 누리며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살고 있지만 대다수 중산층의 삶은 아직 고달프다. 살인적인 입시 지옥과 취직 경쟁을 거쳐 사회인이 된 후에도 긴 근무 시간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며 아이를 낳은 뒤에는 비싼 교육비에 짓눌리고 명퇴의 공포에 떨어야 한다.
퇴직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파트 한 채가 달랑이고 평균 수명은 길어지는데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지가 막막하다. 나의 삶은 고단한데 재벌 등 특권층은 호사의 극치를 누리며 점점 더 부를 쌓아간다. 이것이 아마도 많은 한국민이 정의란 무엇이며 어떤 사회가 올바른 사회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런 문제를 먼저 깊이 생각한 것은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숨을 쉬기 시작한 서양의 계몽 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라고 봤다. 이를 건국이념으로 해 세워진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독립 선언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와 같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건국이념으로 세웠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두 개의 이념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을지 모르지만 능력은 각각 다르다. 개인의 자유를 100% 인정하면 능력 있는 인간은 잘 살겠지만 무능한 인간은 춥고 배고플 수밖에 없다. 이 때 국가는 능력자의 재산을 거둬 무능력자에 줄 수 있는가.
평등주의자(진보주의자 또는 좌파)는 당연히 국가가 개입해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부자만의 나라가 아니며 사회적 약자를 방치할 경우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되고 나중에 가서는 공동체, 즉 국가의 파탄이 불가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고전적 자유주의자 또는 우파)는 국가가 능력자를 징벌하고 무능력자를 우대할 경우 능력자는 사라지고 무능력자만 득실거려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만다고 주장한다.
현대 민주국가의 핵심적인 정치적 논쟁거리는 결국 부를 어떻게 재분배할 것이냐로 요약된다. 1913년 연방 소득세가 생긴 이래 미국 정치는 ‘평등’을 외치는 민주당과 ‘자유’를 부르짖는 공화당 진동의 역사였다. 이는 앞으로도 아마 오랫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와 공화당은 지난주 부자를 포함, 모든 미국민에 대한 세율을 올리지 않고 부시 행정부 시절 수준으로 유지하는 타협안에 합의했다. 이 안은 ‘부자 감세’에 대한 일부 민주당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해 안에 의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이 내년 하원 다수당이 되면 이보다 더 부자에 유리한 법안을 마련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에 민주당으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이번 감세안은 지난번 중간 선거에서 ‘자유주의자’ 공화당이 ‘평등주의자’ 민주당에 압도적으로 이긴 필연적 귀결이라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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