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세운 사람들은 중앙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강한 이들이었다. 투표권 없는 식민지인으로 영국 중앙 정부의 횡포에 시달린 이들은 미합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연방 정부의 힘을 최소화하는데 앞장섰다. 정부의 힘이 너무 강하면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기 쉽지만 정부가 너무 약하면 혼란이 오게 되고 혼란이 오면 개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1781년 독립 전쟁이 끝나고 한 동안 미국은 식민지 동맹협약(Articles of Confederation)에 기초한 주 협의체 형태의 정부를 갖고 있었다. 이 정부는 조세권도 징집권도 없이 주정부의 눈치를 봐가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런 권위도 능력도 없었다.
이런 무기력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한 일부 지도자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 설립을 역설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이를 바꿔놓은 것은 1786년 일어난 셰이 반란 사건이다. 흉년과 불경기로 농장을 빼앗기게 된 농민들이 대니얼 셰이의 지도하에 법원을 습격하고 서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들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는데도 정부는 무력했고 급조된 민병대에 의해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이 반란은 힘 있는 중앙 정부가 왜 필요한가를 분명히 보여줬고 그 결과 1787년 연방 헌법이 제정됐다. 현 연방 정부는 셰이 반란의 산물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연방 정부가 세워진 후에도 중앙 정부에 대한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표현의 하나가 중앙은행 설립에 대한 반대다. 연방 헌법 주창자인 해밀턴은 독립 전쟁을 벌이느라 쌓인 국채를 갚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유럽 선진국들처럼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토마스 제퍼슨 등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대했다.
중앙은행 없이 해결할 수 없는 경제 현안이 산적한 탓에 1791년 첫 중앙은행이 탄생했지만 기한을 연장해주지 않아 20년 만에 사라졌고 1816년 2차 중앙은행이 생겼지만 역시 20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 후 장장 70년 동안 미국은 중앙은행 없이 살았다. 중앙은행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역사의 유물로 사라질 뻔한 중앙은행을 다시 탄생하게 만든 것은 1907년의 패닉이었다. 몇몇 투기꾼들이 돈을 빌려 유나이티드 카퍼 회사의 주식으로 장난을 친 것이 발단이 된 이 사건의 파장은 컸다. 이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주가 조작에 실패하자 이들에게 돈을 꿔준 사람이 책임자로 있던 니커바커 트러스트 금융사가 위험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기다 돈을 맡긴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고 이 회사는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월가 랭킹 3위였던 이 회사의 폐업 소식이 전해지자 ‘뱅크 런’은 모든 금융 기관으로 퍼져나갔고 그야말로 패닉이 월가를 휩쓸었다. 금융업 전체가 마비에 빠질 위험에 놓이자 이를 구하기 위해 미 최대 금융 재벌인 JP 모건이 나섰다. 그가 자신과 록펠러 등 친구들이 모은 거액으로 지불 보증을 선 후에야 패닉은 가라앉았다. 당시 중앙은행이 없던 연방 정부가 할 수 있던 일은 거의 없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연방 정부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금융 위기를 더 이상 강 건너 불처럼 볼 수 없다는 확신을 심어줬고 1913년 ‘연방은행법’이 통과됐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세 번째이자 현재의 중앙은행인 연방 준비은행이다. 이 은행의 창립 목적은 두 가지다. 통화 가치의 안정과 최대 고용이 그것인데 두 가지 목적은 가끔 상충된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돈을 풀면 인플레가 오고 이를 막기 위해 돈줄을 죄면 실업이 늘기 때문이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최근 경기 진작을 위해 6,000억 달러의 자금을 풀겠다고 밝혔다. 버냉키도 이 조치의 위험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인플레보다는 고실업이 더 큰 걱정거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달러화 폭락과 인플레 유발을 초래할 악수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만약 가만있다 고실업이 장기화되면 ‘그 때 FRB는 뭐 했느냐’고 할 것이다. 정책 결정자라는 위치는 이래저래 괴로운 자리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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