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잎이 한 두 잎 떨어지던 어느 가을날 버스 출발 지점에서부터 같이 앉아 있던 한 학급 남학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특히 상대의 특이한 유머 감각에 매료되어 웃다보니 버스는 어느새 종점까지 와 버렸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나 할까?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는 제의에 그렇게 싫지만은 않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가랑잎 딩구는 산길을 산책해 보았다. 눈에 보이는 형형 생색의 나뭇잎들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말로는 도저히 토해낼 수 없는 가을의 풍경 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의 두 눈으로는 볼 수 있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큰 나무 뒤, 바위 뒤, 조그마한 언덕 넘어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나의 두 눈! 그러나 육체의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는 이 친구도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그런 것 같았으나 마음의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참으로 멋이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너무 소녀다운 마음이어서 그랬을까?
러시아의 철학자 ‘솔로비요프’의 말이 생각났다. 그에 의하면 인격에는 세 가지 특이한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수치의 감정이요, 두 번째는 연민의 감정이요, 세 번째는 경건의 감정이다.
이 세 가지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요소라는 것이다.
인간은 어른이나 아이를 불문하고 수치심을 느낀다. 물론 이것은 타의든 자의든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 한다. 두 번째 연민의 감정. 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인격의 감정인가!
나의 두 눈으로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눈으로는 수치의 감정과 연민의 감정을 보고 있노라니 큰 나무 뒤의 것들이 보이고 산 넘어 골짜기까지 보이지 않는가? 두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 이 좁은 마음 속을 메꾸어 주니 몸은 구름을 타고 둥둥 떠오르는 느낌마저 들지 않는가?
조금은 당황이 되기도 했다. 옆에 앉아서 공부하는 같이 하던 학생, 별로 특별한 면도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평범한 클래스메이트와 단풍 구경 좀 한다고 해서 마음의 흔들림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느낌마저 드니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은 단지 ‘솔로비요프’가 갈파한 대로 인격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이한 감정 중 하나인 연민의 감정이 아닐까 생각하니 견디기 힘든 미소까지 짓게 했다.
시간이나 장소 같은 것, 아무 것도 예정, 약속 없이 즐기고 사색하고 걸어보면서 잠깐 잠깐이나마 미래도 그려보게 한 것, 이것이 데이트라는 것이겠지?
마음의 눈은 한 발자욱을 더 앞서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사이 연민의 감정은 씨앗을 심어 사랑의 어린 나무를 키워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조금씩 쌓이는 단풍잎을 밟으며 찬란한 사랑의 작은 나무를 가꾸어 보았다. 번득 번득 지나가는 이 작은 나무에 물을 주어 보기도 하고 열매가 열리는 순간도 상상해 보았다.
물은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썩는다. 그러나 사랑은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그윽한 향기와 신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행복이라는 것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대부분의 남자들한테는 사랑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 정도로 생각을 하지만 여자들한테는 꼭 잡고 놓아 주지 않으려는 것, 가슴 속 깊이 고이 간직하고 감싸주고 싶은 것,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 가을 나의 좁은 마음의 눈에 실오라기같이 어린 거리듯 보이는 이 야릇한 감정이 마음 속의 나무에 물을 주고 잘 가꾸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잠깐 해 본다.
사랑의 나무를 가꿀 때는 그것이 아무리 험하고 고달파도 길들여지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고한다. 나에게도 이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답게 길들여짐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았고 역시 두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는 마음의 눈 하나로 보는 우주는 지극히 우아하고 찬란함을 느껴보는 순간들이었다.
옆에서 내일 학교 교실에서 다시 만나자는 티 없는 미소에 즐거웠다는 마음을 눈웃음으로 답례를 하고 헤어졌지만 역시 헤어짐이란 쓸쓸하고 즐거울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