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캘리포니아 선거엔 컬러플한 화제가 풍성하다.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곤 미 사상 최고의 선거자금 1억4천만 달러를 쏟아 부은 억만장자 멕 휘트먼과 이미 주지사를 2번이나 지내고도 또 돌아온 백전노장 제리 브라운의 재력과 경력의 대결, 전국을 휩쓰는 공화당의 물결 속에서 ‘민주당 최후의 보루 캘리포니아’ 사수 여부가 판가름 날 연방 상원의원 바바라 박서와 칼리 피오리나의 난타전만이 아니다. ‘마약’ 마리화나를 합법화하자는 프로포지션 19, 경기침체 속 환경보호법안의 생사를 결정할 프로포지션 23 등이 연일 시끌시끌 전국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화려한 조명에 가려 제대로 빛을 못 받고 있지만 다음 주 선거엔 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이슈가 있다. 프로포지션 25다. 지난 몇 년 캘리포니아의 고질이 되어 온 예산안 통과 지연을 막기 위한 주민발의안이다.
핵심내용은 간단명료하다 : “예산안 통과에 필요한 주의회 찬성표수를 현행 정족수의 3분의 2에서 단순 과반수로 바꾼다”
요즘 캘리포니아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어는 ‘기능마비’다. 극심한 재정난으로 ‘파산 상태’라는 경고가 나온 지 이미 오래인데 예산안 통과마저 제때 해내지 못하니 주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가뜩이나 뭉텅뭉텅 깎이고 있는 각종 예산들이 통과지연으로 지불마저 늦어지니 그 후유증에 사방에서 아우성이다. 교육에서 복지, 공무원 봉급에 이르기까지 각종 기금지불이 미뤄지고, IOU(후불수표)가 발행되고, IOU에 대한 막대한 이자가 빠져나가고, 주의 크레딧은 정크수준으로 폭락하고…
누구의 책임인가. 예산안 통과는 주의회의 가장 기본적 의무다. 그것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주의회의 지지도가 9%로 바닥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주 예산안은 거의 해마다 6월15일, 통과 마감일을 넘겨왔다. 2008년엔 거의 석 달을 넘겼고, 2009년엔 두 달 지각을 하더니 금년엔 아예 최장기록을 수립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주의회와 주지사가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100일째가 돼서야 간신히 통과되었다. 계속되는 예산파행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프로프지션 25에 “예스”를 안 할 이유가 없다.
지난 35년 동안 5번을 제외하곤 한 번도 제때 통과시키지 못한 캘리포니아 주 예산안 진통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세계적인 불경기, 정부의 과잉지출, 프로포지션 13으로 시작된 불안한 세제 등이 초래한 재정난 해결이 소프트웨어를 바꾸는 장기적 대책이라면 예산안 통과 절차를 바꾸는 프로포지션 25는 하드웨어를 바꾸는 당장의 조치, 근본 해결을 위한 포괄적 개혁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수퍼 머조리티’ 규정으로 불리는 3분의2 조항은 현 주의회에서 예산안 교착상태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예산안과 세금인상안 통과에는 상하양원 각각 3분의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명시한 주 헌법의 규정이다.
현재 민주당은 상하양원 모두에서 다수당이지만 3분의2는 못된다. 그러니 예산안을 통과시키려면 소수인 공화당과 합의해야 되는데 요즘처럼 양극화로 치닫는 분위기에선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든 게 현실이다. 서넛 부족한 찬성표를 확보하자면 동조를 내비치는 공화당 의원들의 조건을 들어주어야 한다. 양보가 어려운 조건을 고집하면 예산안은 야당의 볼모로 잡힌 채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결국 통과시키려면 ‘다수’가 아닌 ‘소수’의 요구가 실현되는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프로포지션 25의 내용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예산안 찬성에 필요한 표수를 3분의2에서 과반수로 바꾼다, 둘째 그래도 예산안이 지연될 경우 의원들의 봉급과 경비를 통과될 때까지 몰수한다(통과 후 소급지불도 안한다), 셋째 세금인상안 통과에는 3분의2 찬성규정을 계속 적용한다.
반대자들은 이 발의안이 통과되면 세금인상이 속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선 ‘과반수 표결은 세금인상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발의안 내용이라고 주 항소법원도 해석을 내린바 있다.
반대진영의 지적 중 일리가 있는 것은 1당 독주에 대한 위험이다. 그러나 손발 묶인 정치가들에게 일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도 해결의 한 방법이다. 위기에는 더욱 그렇다.
현행 3분의2 규정 하에선 아무도 예산 파행의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야당인 공화당은 협상할 필요를 못 느끼고 여당인 민주당은 공화당의 방해전략에 책임을 떠 넘겨왔다. 프로포지션 25가 통과되면 민주당은 더 이상 공화당 뒤에 숨을 수가 없어진다. 공화당 협조 없이 통과시킨 예산안은 전적으로 민주당의 책임이다. 과다지출의 불균형 예산안을 제시한 리버럴 민주당이 싫다면 다음 선거에서 재정적 보수의원들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3분의2 규정 폐지가 만병통치약일 리는 없다. 그러나 망가진 제도를 고치고 기능마비를 풀어주는 첫 걸음은 될 수 있다. 예산안 과반수 통과규정은 이미 47개주에서 별 탈 없이 시행 중이다.
지난 몇 년 해마다 써온 ‘캘리포니아 예산 표류’ 칼럼을 내년부터는 안 쓰게 되기를 기대하며 프로포지션 25에 “예스”를 표기한 나의 한 표도 어제 우송했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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