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계조 한미문화교육원장, 타운 지인들 초청 아주 특별한 모임
“제가 가는 고향길, 눈 속에서도, 함박눈이 쌓인 싸리울에도 따뜻한 사랑의 꽃 등불들을 밝혀주셔서 저는 참으로 평안합니다.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 2일 헌팅튼 비치의 한 일식당에서 아주 특별한 모임이 열렸다. 한미문화교육원장으로 남가주 한인사회에서 35년간 봉사해온 올드타이머 이계조씨(73)가 폐암 투병 중에 마련한 감사의 고별파티, 살아오는 동안 사랑을 주고받았던 지인들을 초대해 풍성하게 대접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 아름다운 애찬이었다.
“사랑의 빚 진 분들께 감사 전해야”… 봉사의 삶 귀감
“나 떠나고 난 후에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먹고 떠들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살아있을 때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최고의 식사를 대접하며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말해온 이계조 원장은 죽음을 목전에 바라보면서도 이 행사를 오랫동안 정성 들여 준비했다.
고급 일식당을 전세 내 최고급 코스요리를 예약했고, 요요마 첼로연주 CD와 노트북을 예쁘게 포장해 선물도 마련했다. 그리고 평소 절친하게 지내온 이창순 목사에게 짤막한 예배 인도를 부탁한 다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 ‘고향의 노래’(이수인)와 감사인사를 적은 초대장을 만들었다.
‘사랑의 울타리’란 제목의 이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불과 20여명. 평생 알아온 사람이야 수없이 많지만 마지막까지 정말 보고 싶은 지인들만 추리고 추려 초대했는데, 막상 당일에는 어떻게들 알고 비집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아 34명으로 늘어났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활기차게 일해온 이 원장은 올해 4월 놀랍게도 폐암 4기 선고를 받았다. 평생 술 담배는커녕 소다 한모금도 안 마시고 깨끗하게 살아온 터라 놀라움이 컸지만 그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때부터 수많은 검사와 수술, 항암치료를 받으며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편, 차근차근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온 이 원장은 이제껏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비록 몸은 수척해졌고 짧게 커트한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평온했다. 지난 6개월동안 수많은 수술과 고된 치료를 견뎌낸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으리만치 빛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들 어찌해야 좋을지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이런 행사는 들어본 적도, 참석해본 적도 없으니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다, 호스트는 암 투병으로 쇠약한 모습인데 음식은 너무 풍성하고 맛있을 뿐더러 선물까지 받게 되니 도무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사람씩 나와 이계조 원장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입은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이제 중년이 된 새얼합창단의 몇몇 단원이 나와 합창연습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30년전을 회상하고, 그때 불렀던 노래를 아직도 기억한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큰절을 올렸던 순간이었다.
약간 숙연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아무도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원장 자신이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이라 누구도 그럴 수가 없었고, 핑크색 넥타이를 매고 나온 이창순 목사가 유머를 섞어가며 어려운 자리를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끈 덕분에 ‘사랑의 울타리’는 따뜻하고 뭉클하고 아름다운 행사로 마칠 수 있었다.
이계조 원장과 사진동호회에서 만나 좋은 인연을 맺어왔다는 김기환 목사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화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고 은혜스럽게 다가온 행사였다”고 말하고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미리 준비하는 귀감을 보이기는 쉽지 않다”며 이 원장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이계조 원장은 이날 오찬 도중 몸이 쇠약해져 먼저 자리를 떴으며, 현재는 거동이 불편하고 상태가 악화돼 가료 중이다.
<정숙희 기자>
이계조 원장이 오찬에 참석한 친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왼쪽은 예배를 인도한 이창순 목사.
이계조 원장이 ‘사랑의 울타리’ 오찬에 참석한 지인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있다.
새얼합창단 창단 등 청소년 인성교육 힘써
70년대 가정사역 운동 시작
▲이계조 한미문화교육원장은
한인 커뮤니티가 우러를 수 있는 극소수의 ‘어른’ 중 한 사람이다.
1970년 이민 와 76년 한미문화교육원을 창설하고 한인사회에서 교회들보다 먼저 ‘가정사역’을 시작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누구보다 열정적인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빠 아이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70년대 초창기 이민시절, KKK 갱들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LA하이스쿨에 청소년선도단체 ‘아가페 클럽’을 만들었던 사람이 이계조 원장이었고, 80년 ‘새얼합창단’을 창단해 10년 동안 거의 자비로 사춘기 청소년들을 데려다 노래와 인성교육으로 메마른 정서를 순화시켜준 이도 이 원장이었다.
건강한 가정, 건강한 여성, 건강한 교회와 문화 운동을 끊임없이 벌여온 그는 지난 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외로운 싱글 노인들과 청소년을 엮는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며 마지막까지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멈추지 않는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유별나고 엄격한 성품, 카랑카랑하고 꼿꼿하기가 대쪽 같아서 그에게 야단 한번 안 맞은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어른이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연하고 부드러워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밤새 잠 못 이루고 도우려 애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창순 목사는 이날 “이계조 선생은 종교와 교회에 매이지 않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며 “교회라는 조직 안에서 ‘주여, 주여’하는 신앙생활을 잘 하지는 않지만,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사신 분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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