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새벽을 기억한다. 민족사 최초로 소외되었던 민중의 승리를 밝힌 그 여명(黎明). 1997년 12월 19일 아침, 우리 모두 뜬눈으로 지샌 새 역사의 전야였다.
서울과 부산에서, 대구와 광주에서, 강릉, 수원, 전주에서 그리고 순천에서, 인천, 대전, 순천에서 민중들이 그늘을 털고 일어나 숨죽이며 던진 한 표 한 표가 민심이 되고 천심이 되어 우리 민족의 5천년 역사에서 최초로 민중이 그들의 자의에 의해 정부를 선택한 이변을 목격하는 감격에 들떠,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악랄한 군화발에 길가의 잡초처럼 밟혀도 항의 한마디 못하고 웅크리던,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던 민초들, 그들은 일제의 경찰에 당할 때만해도 그토록 서럽지 않았었다. 무고하게 빨갱이로 몰려 개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몇 만 명인가? 연좌제로 묶여 살길을 빼앗겨 거리에 내몰린 동포가 몇 십만 명인가?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니 그 게 죄가 되어 인간으로서 당할 수 없는 갖은 모욕과 차별과 불이익을 당했던 저들은 몇 백만 명인가? 그리고 사랑하는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마저 거부된 문명의 사각지대에 매몰되어 통일의 그 날을 학수고대하다 죽어간 동포는 또 몇 천만 명인가?
김대중,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이다! 아! 우리는 해냈다. 그것은 분단 이데올로기와 지역주의, 저 군사독재의 무한 폭력, 압제, 수탈과 불의에의 조종(弔鍾)이자 화해와 통일, 그리고 마침내 민족적 정의의 광활한 지평을 여는 힘찬 전진의 신호탄이었다.
이날의 승리는 동학혁명을 불지른 정의를 향한 성전(聖戰)의 첫 교두보였다. 김대중을 선두로 한 한국 민중들의 반골적 투쟁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과 후계 군사독재자들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의 동거 유혹을 단호히 거부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그의 표호(豹號)는 한국 민중들의 영혼을 일깨워, 격동의 30년 현대사에서 터진 혁명의 고비 고비마다 수많은 민중들이 주검을 딛고 전진하는 용기를 활화산처럼 분출시켰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로 빼앗긴 한국의 주권을 회복하는 민주대장정의 봉화(峰火)였으며, 5.16군사쿠데타 이후 캄캄한 감옥에 갇혀있던 대한민국이 철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36년 만에 드디어 자유를 되찾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남북시대를 연 민족의 지도자였다. 미소 냉전의 상징이었던 남북 분단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그의 프로메테우스적 도전의 결실인 2000년 6월15일의 남북공동선언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통일의 의지를 만방에 천명한 마그나 카르타였다.
평양 정상회담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으로 정당화한 민족상잔을, 그리고 그 상흔을, 아니 그런 아둔한 과거를 잊자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과거의 저주와 구속에서 해방되어 민족사에 희망찬 새 역사의 미래를 건설하자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나는 그가 민족화해에의 공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그리고 1999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이 나라의 독립운동과 건국의 산실이었던 필라델피아 시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았을 때 미국의 ABC-TV 등을 통해 그 통절한 의미를 미국 청중들에게 설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것은 김 대통령의 개인적 영광은 물론 동시에 한국 민중의 영광이자 민족통일 의지, 그리고 민주주의의 승리를 의미한 것이었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진전에 공헌한 그의 업적에 대한 이 같은 대외적 긍정평가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 이후 대내적으로 기대했던 구체적 개혁조처가 실패했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화 운동에서 보인 그의 향도적 역할과 개혁의 기대치 미달, 그리고 햇볕정책 추진과 동시에 보안법 등 분단구조를 떠받쳐온 질서의 온존, 즉 이상과 현실의 괴리사이에 그가 실종되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집권이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3.1독립운동, 4.19혁명, 5.18광주의거, 6월 민주항쟁 등 무수한 성전에서 한국의 소외계층이 골리앗과 같은 파쇼세력을 패퇴시킨 위대한 투쟁의 결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 동족을 죽이기 위해 들었던 칼을 부숴 보습을 만들고, 창을 녹여 낫을 만들 정의로운 민족사의 새 지평이 동터오는 새벽을 맞는 환희를 만끽하고 싶다.
실존철학의 태두 프리드리히 헤겔은 “역사의 주체는 변혁을 주도하는 영웅”이라고 말했다. 그의 집권은 짧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치켜든 정의의 봉화는 영원이 꺼지지 않는 민족사의 선두(先頭)가 될 것을 확신한다.
(Editor.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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