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석 (정신과 전문의/한미문화연구원장)
“심심해 죽겠다””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올해 4월 국제 역학 의학지(International Journal of Epidemiology)에 발표된 기사에 의하면 만성으로 지루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일찍 죽는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연구는 영국 런던에서 35세에서 55세사이의 남녀를 대상으로 3년에 걸쳐 기본적인 재료를 수집한 뒤 10년 뒤에 재검토하여 결과를 분석 수집한 것이다. 발견된 것은 심하게 심심해 죽겠다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 층, 여자이며 신체 건강상태가 별로 안 좋고, 직업이 신통치 않은 일, 운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심심치 않다는 사람들보다 십년 동안에 이미 많이 사망했으며 십년 뒤 재 추적했을 때까지도 여전히 심심하다는 사람들은 조기 사망의 위험율이 아주 높다고 경고하고 있다.
물론 지루함 그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심한 것을 해결해 본다고 줄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폭음하거나 마약에 빠지거나 놀음을 하는 등등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을 하고 정신적으로도 위축되어 있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심심하거나 허전하면 신체 각 부분의 기능이 무기력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죽는다고 한다.
조기 은퇴한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은 즐겁게 지내나 얼마 안가서 심한 우울증에 빠져 정신과를 찾아오거나 ‘지루해 못 살겠다’며 다시 적당한 일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본다. 대개의 사람들이 노쇠현상이 눈에 띄게 빨라지고 사망하는 경우도 본다.이 연구 발표에서 우리가 깨닫고 명심할 것은 심심하다는 것이 “마음, 즉 정신의 상태를 말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 상태가 신체기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 하는 예는 이 ‘심심해 죽겠다’는 것이 처음이 아니다. 의학적으로 잘 알려진 ‘정신신체 질환(psychosomatic disease)’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이유에서 오는 신체질환으로 고혈압, 당뇨병, 대장염, 위괘양, 아토피성 피부염 등등이며, 정신적인 원인에서 오는 신체증상은 부지기수이다. 즉 두통, 현기증, 심장박동, 호흡항진, 빈뇨, 구토증, 소화불량, 식욕감퇴나 식욕항진, 관절통, 불면증, 등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주로 불안감이나 우울감이 그 정신적인 원인이 된다.
흔히 보게 되는 불안공황증(Panic Disorder)은 갑자기 죽을 것 같은 느낌 외에 많은 신체증상, 즉 심장박동, 호흡곤란, 가슴통증, 식은땀, 현기증 등등을 동반한다. 한국이 낳은 의학의 거장인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는 ‘마음이 한 몸의 주인이다(心也一身之主)’ 라는 명언이 있으며 바로 이런 것들을 지칭해서 한 말이다. 마음이 어디 신체에만 영향을 미치는가! 원효대사가 대각을 이룬 계기에 대한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내용이기 때문에 되풀이하지는 않겠으나 아직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단히 요약한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가는 길에 밤에 소나기를 만나 동굴로 피신했을 때 어둠속에서 손에 잡히는 바가지에 들은 물을 마시고 감로수라고 갈증을 풀고 즐거웠으나 다음날 날이 밝자 그 바가지가 해골바가지라는 것을 알고는 속이 뒤집혀 모두 토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토하는 과정에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 즉 이것이 모두 마음의 장난이었구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대사는 더 이상 유학 갈 이유가 없어 되돌아 갔다고 한다.
사람의 행과 불행도 모두 마음가짐에 달렸다. 정신과에서는 물이 반쯤 들어있는 컵을 어떻게 보는가를 보고 즉 반이 차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반이 비었다고 보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을 이해하고 우울증과 불안증에 빠질 소질이 얼마나 있는가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된다.한편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을 다 못해서 ‘바빠 죽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같은 죽겠다는 표현이지만 이런 사람들은 빨리 죽는 것이 아니라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이다. 건강하고 오래 즐겁게 살려면 ‘심심해 죽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인생을 살도록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바람직스럽다. 심심하다고 느끼는 때 바로 자신을 향해 경각심을 가지고 바라봐야 겠다, 나는 왜 이렇게 심심
하다고 느끼는지? 나는 무슨 일을 함으로 해서 심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적이고 신나고 보람을 느끼는 삶을 엮어나갈 수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자연과 시간과 인연과 사회 안에서 ‘나’를 찾아보고, 자신 스스로 ‘나’의 삶을 창조해나갈 에너지와 필연성을 조성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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