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의 여름은 푹푹 찐다. 그러나 7월 이곳에서 미국의 역사를 결정지은 두 개의 사건이 벌어진다. 1776년 7월의 독립선언서 채택과 1787년 7월의 ‘코네티컷 타협’이 그것이다.
독립선언서 채택은 워낙 유명하지만 ‘코네티컷 타협’은 무엇인가. 당시 미국은 독립은 했지만 크나큰 위험에 봉착해 있었다. 강압적인 영국 정책에 대한 반발로 미 중앙 정부는 약하기 그지 없었다. 자체적인 조세권도 징집권도 없이 모든 것을 주정부의 협조에 의지해야 했다.
큰 주, 작은 주 간의 다툼으로 신생 미국은 쪼개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거기다 주 정부의 징세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까지 일어나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고 생각한 지도자들은 새 헌법을 만들어 새로 시작해야겠다고 판단, 필라델피아에서 제헌의회를 열고 헌법 마련에 착수한다.
그러나 어떤 헌법을 만들까를 놓고 주 간에 심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미 독립전쟁을 주도했던 버지니아 등은 소위 ‘버지니아 플랜’이라는 인구 비례로 대표를 뽑자는 안을 들고 나왔다. 반면 군소 주들은 모든 주가 크기에 관계없이 한 표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소위 ‘뉴저지 플랜’이다. 큰 주들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외쳤다. 이 두 주장의 대립 속에 대의원들이 짐을 싸기 직전 ‘코네티컷 타협안’이란 것이 나왔다. 코네티컷 주 대의원이 제시한 이 안은 의회를 상하원으로 나눠 상원은 인구에 관계없이 주당 한 표로, 하원은 인구비례로 의석 수를 정하자는 안이다. 대의원들은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고 이 문제가 해결된 후 헌법 채택은 거의 기정사실화 됐다. 그것이 1787년 7월 23일 일이다.
만약 그 때 이 타협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헌법도, 지금의 미국도 없었을 것이다. 각주 마다 서로 독립국가라고 나서 지금의 유럽처럼 조각조각 갈라져 다퉜거나 아니면 다시 유럽강국의 지배하에 떨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헌법 제정이 이뤄짐에 따라 오늘처럼 광대한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한 나라로 크는 발판이 마련됐다.
헌법 안에는 노예제 인정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한 수정 헌법 10조 같은 상충되는 내용이 들어 있었지만 노예제가 남북전쟁을 통해 폐기된 것도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이 노예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푹푹 찌는 것은 서울의 여름도 마찬가지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는 역사적인 초대 헌법을 제정했다. 단군 이래 처음 한반도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천명한 헌법이 탄생한 것이다. 한반도의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며 국민들은 그 노복에 불과함을 밝힌 조선의 경국대전이나 대한제국 헌법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제헌헌법 여러 조항 중 오늘처럼 부유한 한국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15조 ‘재산권은 보장한다’는 구절이다. 개인의 소유권 보장 없이는 시장은 성립할 수 없으며 시장을 통한 자유 경쟁 없이 경제는 발전하지 못한다. ‘무소유의 삶’은 ‘원수에 대한 사랑’과 같이 꿈으로는 아름답지만 현실로는 불가능하다. 이 비현실적인 꿈을 폭력으로 현실로 만들려던 시도가 공산주의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 이상 사회에 취해 그 건설에 자신을 희생했지만 그 대가로 출현한 것은 지옥이었다.
일제시대 중화학을 비롯한 모든 주요 산업의 전진기지였던 북한이 오늘 저 모양이 되고 당시에는 농지에 불과했던 남한이 지금 경제 강국이 된 것은 각자 헌법에 담긴 내용의 필연적 귀결이다. 미 제헌의회 의장이 조지 워싱턴이었던 것처럼 한국 제헌의회 의장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또 지주 계급의 대변자라는 통설과 달리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농지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 6.25가 나기 전 96%의 농민이 자기 소유의 농토를 갖게 됐다. 6.25가 터진 후 농민 대다수가 박헌영의 예측과 달리 북한군을 환영하지 않은 것이나 건국 후 농업 생산이 일제시대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70 평생을 조국 독립 운동에 바친 공을 놔두고 헌법 제정과 농지개혁에 관한 그의 역할만 보더라도 이승만의 업적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이미지는 장기집권과 부정선거, 친일파 비호 등 부정적인 것뿐이다. 지난 19일로 사망 45주기를 맞았음에도 한국에는 아직 그의 동상조차 없다. 7월 더위 속에 땀 흘리며 나라 세우기에 여념 없었던 옛 사람들의 노고를 돌이켜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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