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피아노의 소리를 좋아하지만 그 시각적 아름다움에 더욱 매료되곤 한다.
나의 그림을 소장한 친구 집에 놀러갈 때에 피아노가 있는 벽 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피아노 연습을 하는 아이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시간을 무척 즐긴다. 출중한 조각품처럼 멋진 피아노와 그림이 함께하는 시각적 요소가 좋아 꼭 피아노를 그려야지 하곤 한다.
롤링 스톤스와 지미 헨드릭스, 레드 재플린의 록 음악을 들으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을 들으며 그릴 때엔 붓의 속도와 붓 터치의 폭이 대범히 나오고 레드 재플린을 들으며 그릴 때엔 강렬한 정도가 극에 달해 그림에 힘이 더해진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의 붓 터치로 그려야 할 때에는 피아노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는 데 특히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을 듣기를 즐겨한다. 숨 죽여 들어야 할 만큼 초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고양된 우주적 화음의 세계에 경탄하곤 한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충무로의 바로크 음악 감상실에서 처음 들었었다. 뜨거운 여름 땡볕 속을 걸어 도착했던 어두운 음악 감상실에서 청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패사디나의 한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까만 긴 머리카락의 열세 살 중국 소녀가 노란 드레스를 입고 길고도 육중한 검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걸 보았다. 아직 활짝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소녀의 나른하고도 순진한 존재가 음악의 세계와 만나 불러일으키는 고결한 자태가 참으로 아름다워 눈물이 흘러 내렸었다.
그녀의 연주 다음에는 스물세살의 연주자가 짙은 밤색 드레스를 입고 스트라빈스키를 연주했다. 그녀의 까맣고 짧은 머리카락과 백옥같이 흰 목덜미와 팔선의 아름다움, 열광적인 스트라빈스키 연주에 그토록 압축되고 강렬한 육체적 감각이 가슴과 전신으로 흘러 음악의 정신과 합일하는 순간들이 자아내는 시각적 아음다움에 혼미함에 가까운 감각의 깨어남을 느꼈다. 숲이 가득한 밤거리로 나왔을 때 일상의 시간이 우주적 깨어남의 찬란한 시간으로 전환되고 그 예술의 마력적인 힘으로 인해 모처럼 살아있음의 강한 충일감을 느꼈다.
마침 코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연애를 다룬 영화 전편에 흐르는 스트라빈스키의 강렬한 현대적 감각의 음악을 들었던 터라 연주가 더욱 즐거웠다.
피아노는 늘 어떤 동경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에 잠시 그 동경의 세계에 닿는데, 그 세계는 일상의 세계 한 가운데에서 나를 번쩍, 가벼이 들어 올려 드높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데려다 준다.
권태와 무력감, 인생의 허무함과 한계에 때로 쓸쓸히 인생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인가라는, 마음을 스치는 자조적 자괴감을 순간에 들어 올리고, 저 동경의 세계의 문을 열어 가장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생명력의 소용돌이에 던져버리는 예술 감각의 세계와 함께 할 때 그토록 자명한 인생의 덧없음이 잠시 찬란한 우주적 화음의 물결에 출렁이곤 한다.
어린 시절 음악수업은 광주일고의 어느 과외 영어 선생님 댁에서였다. 백납이라는 병이 있어 낮에도 짙푸른 색 커튼을 친 그의 집에는 아름답고 청초한 아내의 모습이 보였고 과외수업의 휴식 시간에 꼭 음악을 들려주시곤 했다.
바흐의 브란델부르크 협주곡을 들려주며 이 음악을 들으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 푸른 커튼, 병적으로 하얀 피부와 음악, 모두가 어둡고도 신비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는데 들으며 죽어도 좋다는 그 음악의 세계란 무엇 일까가 내내 의문이었다.
중학교 복도에 걸려있던 쇼팽의 초상화<사진>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들라크롸가 그린 그림인데 어린 마음에도 그 위대성이 감도는 붓 터치의 힘차고 예리한 감각의 출중함이 놀라와 그 그림 앞에 자수 오래오래 서 있곤 했다.
말년의 들라크롸는 저녁이 되면 긴 산보 끝에 숲속에 있는 쇼팽의 집에 도착해 그의 연주를 듣곤 했다는 데 인간이 갈 수 있는 감각의 극치에 달한 고독한 두 거장이 만나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은 늘 어떤 감동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박혜숙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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