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축구팀의 별명은 ‘오렌지 군단’이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 왕실의 색이 오렌지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왕실의 색은 왜 오렌지일까. 그 까닭은 왕실을 창립한 사람 이름이 윌리엄 오렌지 공이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스페인의 강압적인 통치에 염증을 품은 네덜란드인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1581년 7월 작성된 ‘네덜란드 독립선언’은 어째서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더 이상 왕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가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스페인 왕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는데 그 형식이나 내용이 200년 후 작성된 미 독립선언서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미 독립선언서를 쓴 토머스 제퍼슨은 절대왕권에 대한 영국인들의 저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저항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윌리엄이 암살되는 수난에도 불구하고 장장 80년에 걸친 독립전쟁을 벌여 164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3차례에 걸쳐 영국과 전쟁을 벌여 오히려 영국을 혼내 준다. 영국이 열세를 만회한 것은 1688년 명예혁명 때 또 하나의 윌리엄 오렌지 공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왕이 되면서부터다. 명예혁명의 이론적 기초를 놓고 실제로 이에 가담한 존 로크가 피난해 있던 곳도 네덜란드였다.
영국이 네덜란드에 진 빚은 이뿐만이 아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상 첫 자본주의 국가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네덜란드라 해야 마땅하다. 증권시장이 처음 생긴 곳도 여기고 보험과 연금, ‘튤립 매니아’로 불리는 첫 자산 버블이 부풀었다 터진 곳도 여기다.
영국은 또 광대한 식민지 덕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지만 사실은 네덜란드가 먼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지금 뉴욕의 맨해턴 섬을 인디언들로부터 사들인 것도, 아시아로 진출하는데 필수적인 병참기지인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도 네덜란드였다. 그 덕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무역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서양과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 일본도 네덜란드와의 교역만은 허용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에서 서양 학문은 ‘네덜란드 학문’이었고 네덜란드 여러 주중 대표적인 홀란드의 이름을 따 ‘란학’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영국과의 경쟁에서 지고 제2차 대전 후 탈식민주의 바람과 함께 식민지 대부분을 잃어 버렸지만 최근까지 네덜란드 후예가 주인 노릇을 해온 나라가 있다. 남아공이다. 다른 곳과는 달리 남아공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인들은 직접 농사를 지었다. 소위 보어족(네덜란드 말로 농사꾼이라는 뜻)으로 불리는 이들의 후손들은 1994년 만델라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정치, 군사, 경제 분야를 모두 독점하고 남아공을 통치해 왔다.
서양 국가 중 제일 먼저 자유를 부르짖으며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의 후예가 제일 마지막까지 야만적인 인종차별주의를 강행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물론 네덜란드의 인권단체들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하이트를 철폐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스페인 축구팀의 별명은 ‘무적함대’다. 무적함대는 1588년 영국을 침공하려다 궤멸됐지만 스페인이 영국을 공격한 것은 영국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부채질하며 스페인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스페인은 네덜란드 때문에 망하고 영국은 그 덕에 세계의 강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 침체일로를 걷던 스페인은 80년대 들어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도입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런 인연을 가진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네덜란드 후예가 세운 남아공 월드컵 결승에서 만나 혈전 끝에 아슬아슬하게 스페인이 승리했다. 축구에서는 스페인이 이겼지만 지금 세계는 400여년 전 북유럽의 작은 도시에서 울려 퍼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의 함성이 주도적 이념이 되었다. 월드컵 결승을 지켜보며 역사의 묘한 연결고리를 생각한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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