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캘거리에 다녀왔다. LA에 살던 문우가 딸네 집으로 이사를 하여 초대한 것이다. 마침 그녀가 주선한 캘거리 문인회 주최의 수필 특강이 있었다. ‘맑은물 문학회’가 초청한 강사는 지난해 재미수필가협회의 세미나에 오셔서 강의를 하셨던 교수님이셨다. 인연이 인연을 낳아 다시 한 번 뵙는 즐거움이 있었다. 문학회가 생긴 이후 전무후무한 행사라며 모여든 문학인들이 30여명이었다. 4시간 거리에서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당도하고, 첩첩산중을 2시간 이상 드라이브하여 카풀로 오기도 하였다.
초청강사인 교수님은 한국의 대학 강의시간을 조정하며 어려운 걸음을 하셨다. 먼 길 오신 강연에 강의료도 받지 않으신 그 마음을 무엇이라 표현할까? 수필을 배우려는 이들을 위해선 시간과 물질의 손해도 아깝지 않다는 교수님께 감사했다. 열띤 특강을 듣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모두 ‘문학’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모인 열정의 사람들이었다.
수천만년 전 신이 창조한 모습 그대로의 캘거리와 밴프는 내 생애에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경치였다. 대자연 속에서 마음껏 심호흡하였더니 그동안 강퍅해진 내가 조금은 순화된 듯 싶다. 하루 종일 푸른 숲의 냄새를 맡고, 시린 하늘에 눈을 맞추고 흐르는 강물의 소리를 들었다. 곰과 사슴과 산양과 다람쥐와 동행하였다. 깊어가는 밤, 온갖 풍상을 견디어낸 동료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심금을 울린다. 그 인간승리가 아름다워서 울었다. 자신을 감추어둔 사람이었기에 가벼운 사람 정도로 여겼던 그간의 오해가 미안하였다. 어느 누구의 간증이나 설교보다 진솔했다.
LA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다. 좌석이 제1열이어서 다리를 쭉 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널널한 자리를 차지한 게 행운이다 싶었던 것도 잠시, 이륙 직전 스튜어디스가 오더니 휠체어를 타는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젊은 청년이 불편한 몸으로 동행과 승무원의 도움을 얻어 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뒷자리로 옮겼다.
뒤에서 관찰하니 청년은 힙합전사 같았다. 민소매 검정셔츠에 모자를 쓰고 귀는 뚫어서 링을 두개 매달고 오른쪽 귓불엔 압정 같이 귀고리를 붙였다. 짧은 머리의 뒷목덜미와 드러난 어깨엔 수술자국이 지네처럼 남아 있다. 힙합의 역동성과 휠체어의 반 자유성이 상충되는 광경에 마음이 아렸다. 청년에게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손가락마다 반지를 낀 흰 손은 가냘팠다. 그 손등엔 무서운 해골이, 팔 전체엔 검고 붉은 불길의 문신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왼 팔뚝엔 가로로 길게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Carpe Diem’
카르페 디엠은 ‘Seize the Day’의 라틴어가 아닌가? ‘매일 매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청년의 왼 팔뚝에 새겨진 ‘카르페 디엠’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 문신이 언제부터 청년의 팔뚝에 존재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마치 “내일은 없다…”라고 외치는 청년의 절규처럼 보였다. 문신이라면 조폭들의 용트림 따위로 생각하고 혐오하던 내가, 문신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똑같은 상황 앞에서 어떤 사람은 좌절하지만, 다른 사람은 극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이왕 거쳐 갈 여정이라면 드러매틱한 삶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그러나 인생의 궁극이 행복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스쳐가는 수많은 인연이나 풍광들을 볼 생각도 음미도 못하고 질주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다는 걸 청년이 알았으면 좋겠다.
치열하게 살지 못한 내 인생이 모두에게 나에게 부끄러웠다. 좀 더 진지해지리라 반성했다. 실없는 농담을 해대면서 마치 개인기로 착각하던 내가 몹시 창피했다. 캐나다 여행은 나의 삶에도 나의 글쓰기에도 ‘단비’였다. 인생의 하프타임에서 가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4박5일간 감탄하고 감동하며 울고 웃었더니 부흥회를 마친 듯 속이 시원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모든 이들은 내 마음을 일렁이게 하였다. 나도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심했다 “카르페 디엠!”
이정아 /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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