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버드 상원의원(웨스트버지니아·민주)이 이번 주 초 만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58년에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니까 무려 반세기가 넘는 9선 의원으로 미국 역사상 최장의 상원의원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당선되어 오바마 대통령까지 11명의 백악관 주인공들을 알고 지낸 인물로서 경제적으로 침체된 웨스트 버지니아를 연방 자금의 투입으로 오늘날처럼 비교적 발전된 주로 만드는데 수훈갑을 이루었다.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말이 그에게 꼭 맞는다. 1917년생인 로버트 버드의 진짜 이름은 코넬리어스 세일 2세로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1918년에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자 그의 아버지는 열 달된 아들을 웨스트 버지니아주에 살던 이모와 이모부집에 보내게 되었기에 이름이 달라진 것이다. 그가 16세가 되기까지는 자기의 출생 배경을 전혀 몰랐었다니까 그의 생부는 어지간히 몰인정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좌우지간 그의 양부모와 함께 웨스트 버지니아의 탄광촌 이곳저곳에서 무척 고생하면서 자랐지만 공부는 잘해서 고등학교 졸업식의 대표연사였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은 엄두도 못 낼 가정 형편이라서 19세 때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동갑내기와 결혼을 하고 식료품점의 야채부 직원으로 일하다가 고기써는 법을 책으로 배워 수입이 더 좋은 육류부 직원으로 두 딸을 양육시킨다.
2차 대전 중에 볼티모어의 해군 기지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버드는 식료품점을 열어 경영하는 동시에 자기 교회에서 성서 강습을 시키던 것이 라디오 방송에 선택되어 지방 유명인사가 된다. 그 무렵 그는 흑인 증오 폭력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KK)에 가입했다가 1년 후에 사직을 했지만 한동안 KKK의 사상에 동조해 왔다는 오점을 남긴다. 예를 들면 KKK의 우두머리가 제안하여 버드는 1946년 웨스트 버지니아 주하원의원에 출마하여 바이올린을 들고 선거운동에 임하여 자기 지역 선거민들을 거의 다 만나다시피 뛰었기 때문에 당선된다. 1952년에는 미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물론 버드는 자기의 KKK 가입 사실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무수히 되풀이 해왔다. 그러나 미국 남부의 민주당 출신 연방 상원 의원들이 모두 그랬듯이 그 역시 한동안은 흑백의 분리, 즉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거나 묵인하는 편이었다.
묵인 정도가 아니라 1964년에 흑인들에게 동등권을 부여하는 민권법안이 상원에 계류 중이었을 때 버드는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 장광설)를 벌여 무려 14시간 13분이나 상원 연단을 점령하여 그런 점에서도 최고 기록을 남겼다.
또 1961년부터 69년까지 워싱턴 DC 담당 예산 소위원회 위원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는 많은 흑인들을 실격시키는 일에 앞장섬으로써 흑인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었다. 그리고 1968년 마틴 루터 킹 박사의 암살로 DC에서 폭동이 일어나 14가가 불바다가 되다시피 타고 있을 때 미국 군대를 총동원해서라도 폭도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된다고 선언한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흑인들이나 민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마틴 루터 킹의 연방 공휴일 제정에는 앞장서는 면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웨스트 버지니아의 발전을 위해 그의 정치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서 웨스트 버지니아에 많은 연방 정부기관들이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면 FBI 지문센터, 재무부와 IRS, 어류 및 야생동물 종사자들의 훈련센터, 연방 감옥, NASA 연구센터 등이 그 주의 각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상원 예산위원회의 위원장 또는 최고 관록의 중진위원으로서의 그의 영향력은 바다에 면하지 않는 그 주에 해군과 해안 경비대 관계 부서들이 존재한다는 데서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그의 부지런함은 전설적인 모양이다.
하원의원 그리고 상원의원을 하면서 야간 법대를 다녀 1963년에는 아메리칸 대학 법대에서 학위를 받는다.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던 미국 헌법은 꺼내볼 필요도 없이 줄줄 외우는 총명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상원에 대한 3권으로 된 권위 있는 저술을 남길 정도의 실력자 겸 학자였다. 상원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담겨있다는 역저이다.
민주 공화 양당 의원들 모두의 애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젊었을 때의 실수와 편견을 회개하고 변화하면서 발전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는 귀감이 된다. 내 개인적으로 특히 칭찬하고 싶은 점은 1937년에 결혼한 그와 그 부인이 2006년에 사별할 때까지 68년간의 동고동락을 유지했었다는 사실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