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자발적인 집행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라는 책이 있다. 하버드대 교수인 다니엘 골드하겐이 쓴 이 책은 90년대 말 출간됐을 당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는 저자가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극소수 비밀 조직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폭넓은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이뤄진 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 학살의 진상을 얼마나 많은 독일 국민이 알았고 깊이 관여했느냐는 아직까지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숨김없이 드러냈고 집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다수의 독일 국민은 나치당에 표를 던졌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파리를 점령했을 때도 대다수 독일 국민은 열렬히 지지했다. 히틀러는 배고픈 독일 국민에게 빵을 줬고 제1차 대전의 패배로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설욕의 기쁨을 안겨줬다. ‘백 장미단’을 만들어 반 나치 투쟁을 벌이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6명의 뮌헨 대학생과 히틀러 암살을 기도한 독일 장교 슈타우펜베르크 등은 소수 중의 소수였다.
다수가 항상 옳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미국 역사에도 얼마든지 있다.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을 당시 인구의 1/3만이 이를 찬성했으며 1/3은 반대, 1/3은 중립이었다. 결국 소수의 미국민들이 절반의 무관심과 절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계 최강의 영국군과 싸워 독립의 위업을 이뤄낸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하나로 꼽히는 링컨의 가장 큰 업적인 노예 해방도 마찬가지다. 당시 노예의 전폭적인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링컨 자신도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합중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연방 탈퇴라는 남부 주들의 극단적인 행동과 노예 해방에 평생을 바친 윌리엄 개리슨 같은 ‘행동하는 양심’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역사상 보기 드물게 ‘정의로운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대전 때도 그랬다. 독일이 유럽 전역을 짓밟으며 만행을 일삼고 있을 때도 미국 여론은 절대적으로 참전 반대였다. 제1차 대전 때 개입했다 아무 소득 없이 미국 젊은이들의 생명만 앗아갔던 선례를 들며 참전 불가를 외쳤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없었더라면 미국은 참전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6월 한국 지방 선거 결과를 놓고 민주당에서는 ‘국민의 심판’ 운운하며 기고만장해 하고 있다. 가소로운 일이다. 민주당은 서울과 경기에서 완패가 예상됐으나 석패에 그쳤다. 충청권에서의 승리는 한나라당과 자유 선진당이 보수 표를 갈랐기에 가능했고 전교조 계열 교육감의 대거 당선은 친전교조는 단일 후보를 냈는데 보수는 중구난방으로 표가 갈려 패배를 자초했다. 전교조 계열의 무상급식 공약도 효과를 봤다.
그러나 다수가 한나라에 반대표를 던졌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한나라당 정책이 국가의 100년 대계에 비춰 볼 때 잘못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충청권에서 표를 많이 깎아 먹은 행정도시 문제만 해도 행정부를 분할 이전하는 것이 얼마나 낭비가 큰 것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충청 지역 이기주의에만 호소하는 것이 옳은 길인가. 무료 점심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무료 저녁과 아침도 제공할 일이다.
이런 올바른 정책 집행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보수의 무능과 분열이다. 스스로 한나라당을 깨고 나와 보수 분열에 앞장섰으면서 이제 와 보수 대연합을 주장하는 이회창이나 노무현과 연대했다 약속을 깬 후 한나라당에 들어와 대표를 맡았던 정몽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토라져 있는 박근혜나 반대파를 껴안을 줄 모르는 이명박 모두 정치인으로는 낙제점이다.
검찰 수사로 궁지에 몰려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날 것을 안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기 추종자들을 살렸다. 그것이 이번의 선거 결과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크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니...”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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