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구멍가게인 평화수퍼에는 외상장부가 있었다. 가게주인 아주머니가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쓰던 손바닥만 한 공책 말이다. 겉표지엔 ‘신문사 집’이라고 적혀 있고, 한 달에 한 번 아버지 월급날에 외상값을 정리하곤 했다. 다른 집은 그 당시의 흔한 반찬거리인 두부나 콩나물이 주종이었는데 우리 집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주2, 소주4’이거나 아예 같다는 표시로 땡땡점 두개만 죽 찍혀 있었다. 2홉들이인지 4홉들이 소주인지 병수만 구별 잘 하면 외상값 계산은 참으로 쉬웠다.
신문기자였던 아버지는 술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드셨다. 나중에 우리가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졌을 때, 엄마는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아버지의 내의 대신 소주 한 박스를 사오라고 하셨다. 동생들도 그 전통대로 하였다고 들었다. 소주 한 박스를 받은 아버지의 파안대소가 생각난다. 아주 흐뭇한 얼굴이었다. 선생 노릇을 해서 첫 월급을 탄 딸이 대견했는지 소주 한 박스가 더 대견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후에 신문사에서 직위가 올라도 아버지의 술은 그저 두꺼비가 그려진 그 술이었다.
그 옛날 신촌 로터리에서 연세대학 솔밭 길을 지나 고개를 넘어 연희동 집으로 걸어오시곤 했다. 추운 겨울엔 목도리를 보자기처럼 머리에 쓰고, 연세대학 앞의 하바나 빵집에서 대패 밥으로 포장한 찐빵과 만두를 사서 품에 안고 오셨다. 술이 거나한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서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동네 개들이 컹컹 짖기 시작하고, 우리는 내복 바람으로 “아버지다. 아버지다!”하고 뛰어나갔다. 아버지보다는 그 빵을 더 기다렸던 시절이다.
무교동이나 청진동의 단골 선술집을 들르지 않고 오시는 날은 시인 친구들을 몰고 집으로 오셨다. 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고 소주를 밤새 마시던 가난한 시인 아저씨들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시에도 술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밥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셨던가 싶다.
정년퇴직하신 후 일 년에 한 번씩 오셔서, 텃밭도 가꾸시고 페인트도 칠하시고 아이 픽업도 해주시던 아버지가 계셔서 두어 달은 편했다. 아버지가 와 계신 동안에 한국에서 드시던 소주만 사다 드린 게 뒤늦게 후회가 된다. 흔해 빠진 게 양주인데 아버지는 으레 ‘소주’려니 했던 무심함이 이제야 걸린다. 선물로 받은 밸런타인이나 살루트가 술장에 가득했는데 말이다. 살가운 딸 애교스러운 딸이 못되어 고명딸이면서도 딸 키우는 재미를 드리지 못한 것도 후회스럽다. 편찮으시단 소식을 듣고 가서 뵙고서 인천 공항에서 헤어진 것이 우리 부녀의 마지막이었다.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데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주름 사이로 눈물이 흐르는 거였다. 나는 그때도 “늙으면 주름 때문에 웃는지 우는지 분간이 안 되는구나…” 속으로 생각만 하고 아버지의 맘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다시는 못 볼 줄 아셨나보다. 그때를 떠 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메인다.
곱슬머리 은발에 키가 훤칠하셨던 아버지를 종종 길거리에서 만나는 착각을 한다. 이곳의 미국 할아버지들이 대개 그런 모습이어서 깜짝 놀라는 때가 있다. 아닌 줄 알면서 황급히 뒤를 따라가다가 실망하여 울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게 돌아가신 후의 후회는 늘 늦을 뿐이다. 얼마 전 아버지 기일에 엄마께 전화하여 “씩씩한 과부로 산 10년을 축하합니다” 했다가 욕만 먹었다. 실은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나도 엄마도 눈물이 날까 봐 부러 농담을 한 것이었다.
한국 양조산업의 큰 공헌자인 아버지도,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통하여 말년엔 신앙생활을 하셨다. 술만 마시던 젊은 날이 하나님께 죄송하고 교우들에게 부끄럽다며 골방에서 세례를 받으신 순진한 아버지. 6월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 있기도 하고 ‘아버지 날’도 있는 달이다. 시아버님도 6월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가정의 6월은 추모의 달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마음껏 그리워해도 좋은 달이다.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아버지께 못 다한 사랑의 외상을 갚을 작정이다.
이정아 /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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