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라는 것 말고도 멕 휘트먼과 스티브 포이즈너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핵심 공화당은 아니라는 것. 캘리포니아 주지사 공화당후보로 출마한 이들은 기업가 출신의 정치 아웃사이더로 경선 중반까지만 해도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하고 결혼을 제외한 동성애 커플의 기혼자 권리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중도보수에 속했다. 그런데 이들이 네거티브 공격이 난무하는 진흙탕 싸움을 치르는 와중에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경선 막바지에 이른 지금 전형적인 극우보수 공화당 후보로 변신한 것이다.
특히 이민이슈를 둘러싼 난타전은 목불인견이다. 한때 부시의 포괄적 이민개혁안을 지지했던 포이즈너는 애리조나 강경 이민단속안을 캘리포니아에선 더 한층 확대 실시해야 한다고 외쳐대는 반이민의 기수로 돌변해 휘트먼을 ‘불법이민 사면 옹호자’로 몰아붙이며 티파티 유권자들을 향한 구애작전에 여념이 없다. 질세라 휘트먼도 “사면 100% 불가”를 다짐하며 ‘불법이민 부모들의 죄를 자녀에게 물어선 안된다’던 평소신념은 어디다 두었는지 불체자녀 주립대 입학 반대, 성역도시 제거, 국가방위군 국경배치 등 강경 이민공약을 날마다 쏟아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골수공화당 유권자들이 좌우하는 경선 통과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주지사 후보들만이 아니다. 공화당만의 문제도 아니다. 연방의원, 주의원 후보를 선출하는 당 경선도 마찬가지다. 공화당은 극우보수의 입맛에 맞아야, 민주당은 리버럴 노조의 비위를 상하게 말아야 경선에서 승리해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이렇게 당파색으로 무장한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면 연방의회든, 주의회든 교착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또 당선 첫날부터 재선을 걱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니 당명을 거슬릴 수 없어지고 이런 현상이 쌓이면서 정치의 양극화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미국정치, 특히 캘리포니아 정치의 현주소다.
이같은 정계의 양극화, 캘리포니아 주의회의 교착상태가 바로 ‘프로포지션 14’를 지지하는 이유다.
다음주 8일 캘리포니아 예선에 회부된 프로포지션(주민발의안) 14는 주 예선제도를 ‘오픈 프라이머리’ 즉 열린 선거로 바꾸자는 제안이다. 예선에서도 유권자들이 당적에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도록 하여 초당적 협력이 가능한 중도파 후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연방의회와 주의회, 주지사 등 주 공직 선출 선거가 대상이며 대통령선거는 포함되지 않는다. 통과되면 내년 선거부터 적용된다.
현행 캘리포니아 선거는 예선과 본선, 2단계로 실시된다. 예선에선 정당에 등록한 유권자들이 자기당의 후보를 뽑는다. 각당의 강경 핵심그룹이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이 예선을 통과해야 전체 유권자들 앞에 서는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발의안 14가 통과되면 쉽게 말해 당 경선이 없어지는 셈이다. 예선은 당적에 관계없이 출마한 모든 후보들의 경합이 될 것이다. 주지사 투표용지엔 휘트먼과 포이즈너만이 아니라, 민주당의 제리 브라운과 군소정당 후보들까지 한꺼번에 기재되어 모든 유권자들이 그중 한명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본선엔 예선의 최다득표자 2명만(설사 같은 당이라 해도) 출마하게 된다.
오픈 프라이머리가 시행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선 중도파 후보들이 각당의 목청 큰 강경 핵심그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체 유권자의 표심 파악에 애쓸 것이다. 당선된 후 재선을 계산한다해도 당론보다는 민심에 신경을 써야 하므로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펼칠 것이다. 소모적 대립보다는 초당적 타협을 모색하며 건전한 재정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지출삭감과 피치 못할 증세를 신중하게 합의하고 매년 주 예산도 신속하게 승인할 것이다. 그래야 업적이 생기고 업적이 있어야 다시 유권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발의안 14가 시행되면 주정계의 교착상태도 차츰 해소되고 예선의 투표율도 높아질 것이라는 지지자들의 주장은 꽤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공공정책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0%가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당들의 지도부는 당연히 반대한다. 본의 아니게 발의안 14는 하나의 ‘기적’을 연출했다. 사사건건 맞서며 등돌려온 캘리포니아의 민주·공화 양당 지도부가 손잡고 공동전선을 펴고 있는 것이다. 오직 발의안 14의 부결을 위해서다. 양당체제 붕괴, 더 큰 혼란 야기 등을 내세우지만 선거에서의 당권 약화 우려가 본심일 것이다.
사실 학계에서는 발의안 14의 영향력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다. 또 현 정치의 교착상태를 완치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그러나 LA타임스의 지적처럼 해결을 위한 작지만 확실한 첫 걸음은 될 수 있다.
대부분 유권자들의 후보에 대한 기대는 비슷하다. 내가 낸 세금으로 봉급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유능한 리더라면,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명감을 가졌다면, 주민들의 힘겨운 일상을 기억하며 이념적 당파대립보다는 초당적 문제해결을 애쓰는 정치가라면 어느 당 소속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프로포지션 14의 통과는 이런 정치가를 한명이라도 더 배출하는데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록 /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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