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부자들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 쓴 소리, 바른 소리를 많이 해 온 빌 게이츠 시니어가 부자들의 세금부담을 늘려야 한다고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 최고 부자인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를 아들로 둔 게이츠 시니어는 11월 중간선거에 회부되는 워싱턴주의 개인소득세 도입 방침과 관련해 “내 아들을 포함해 부자들이 더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게이츠 시니어는 1997년 발족한 ‘책임지는 부자’라는 단체의 초대회장이다. 평소 부자들에 대한 상속세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세금제도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게이츠 시니어는 이런 이유로 회장직 제의를 받았을 때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부자들이 계속 욕심을 부리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망한다. 부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자는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부자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미국보다 한발 더 나가 있는 곳은 유럽이다. 유럽에서는 단순히 세금폐지 반대 차원이 아니라 아예 세금을 더 부과해야 한다고 부자들이 먼저 청원하고 나서기까지 한다. 얼마 전 독일의 부자 수십명이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돈이 너무 많다”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재원 확보를 위해 부유세를 부과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구 부자들의 이런 모습은 수조원의 재산을 가졌음에도 상속세 수백억원을 내지 않으려고 온갖 탈법과 편법을 마다하지 않는 재벌들에 익숙한 어떤 나라 국민들에게는 생경하기까지 하다.
지난주 발표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0개국의 선진화 수준 조사에서 한국은 하위권인 24위로 나타났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의미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부문에서는 꼴찌인 30위였다. 상위권은 역시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차지했다. 이들 국가들은 고사하고 프랑스와 일본 정도의 선진화 수준에 도달하는 데도 13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게 조사기관의 전망이었다.
몇 달 전 김용철 변호사가 펴 내 화제가 됐던 책에는 삼성그룹이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 존재인 발렌베리 그룹은 150년 이상 존재하면서 5대째 세습이 이뤄져오고 있다.
그런데도 스웨덴 국민들은 이런 세습에 저항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후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에 적용되는 철저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에 있다. 이 재벌의 후계자가 되려면 부모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복무해야 한다는 2개의 필요조건을 기본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 그런 후 치열한 경쟁을 통해 경영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북유럽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전통과 부자들의 높은 책임의식을 우리는 부러워한다. 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런 사회적 전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웨덴의 경우만 해도 이런 가치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혹독한 사회적 대가를 치러야 했다. 기업과 근로자의 충돌로 사회적 불안은 높았고 흉포한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은 것이 1938년 체결된 역사적인 샬트셰바덴 협약이다. 이 협약에 따라 발렌베리 가문은 정부특혜를 보장받는 대신 85%의 소득세를 내는 등 사회적 공헌에 앞장서고 있다.
서구 부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당장 자기 주머니를 지키기보다는 사회적 공헌을 통해 나누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돈과 존경이란 면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오랜 학습의 결과이다. “세금내기 운동은 부자가 계속 이어지게 하자는 것”이라는 게이츠 시니어의 설명은 이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OECD 국가 중 꼴찌라고 해서 너무 비난만 할 일도, 풀 죽을 일도 아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단기간에 가능할지 몰라도 그에 걸맞는 정신적 소양을 갖춰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마치 비행기로 빠르게 공간이동을 하면 몸은 이곳에 있는데 신체리듬은 떠나온 그곳에 한동안 머물러 있듯 인식에도 어쩔 수 없는 지체현상이 나타난다. 한국은 지금 그러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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