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 시내버스 속에서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낯익은 얼굴인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굴까?!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리고 몇 초 후에 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동생집에 잠시 놀러온 여행객이지만 그 사람은 행색으로 보아 분명히 여기 살고 있는 교포였다.
내가 서울에 살 때 버스속에서 무심중에 눈길을 주고 차에서 내려 한참 걸어가면 내 뒤를 따라오는 놈들이 있다. “왜그래?” “한번만 봐주세요.” 그러면서 엉뚱한 놈이 잘못했다고 손을 싹싹빈다. 나하고 눈만 슬쩍 마주쳐도 치기배들은 자기를 지목하는 줄 알고 내 뒤를 그냥 졸졸 따라왔고 나는 그만큼 그 놈들한테 이름난 킬러였다.
그 당시 수사팀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검사부장이 도둑놈 제일 잘잡는 말단 형사인 나를 불렀다. 재계최고 재벌회장이 어느 한 사람을 고발했는데 사건의 내용은 재무를 맡고 있는 자가 비자금을 감추고 끝까지 그런 돈은 없었다고 부인한다는 것이다. 공소시효는 15일이고 이제 사흘만 넘기면 그자는 무죄가 되니 도와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아무 증거도 없는 사실을 놓고 자백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동안 은행계좌도 추적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돈뭉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검사가 나보고 물었다. 재벌회장쯤 되는 사람이 설마 자기 지명도가 있는데 째째하게 자기발로 걸어서 법정에 자진출두하지 않을거라는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회장은 그냥 덮어두라고 지시했지만 다른 사람이 고소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검사님, 그럼 내일 일류호텔 귀빈실에 그자를 데려오십시오. 그리고 그전에 귀빈실에 고문기라는 고문기는 모조리 다 갖다 놓으십시오.”
“아니, 고문기라니?” “예, 지금 사용하지 않는 것까지 모조리 갖다 놓으십시오. 검사님은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날 약속된 시간에 호텔 귀빈실로 그자가 들어왔다. 무거운 커튼을 친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한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한 야릇하고 무서운 정적만 흘렀다. 검사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나를 불렀는지 그 자의 얼굴을 보니 알만했다. 소심줄이라고? 그래?! 어디 나하고 대결 한번 해볼까?
나는 앞에 앉은 그자에게 정중하게 담배를 한대 권했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여기 맥주 좀 들여보내.” 검사부장과 미리 짜두었던 일이다. 그러자 검사가 쟁반에 맥주병을 받쳐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됐어, 나가봐.” 내 말에 검사는 알았습니다 하고 연신 굽실거리며 나갔다.
그때 법대 출신인 그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아니, 이 사람이 누구야? 독립된 사법부에 검사보다 높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취조하는 검사가 저렇게 쩔쩔매는 이 남자가 도대체 누구냐 말이야? 그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 자 앞에서 나는 일어나 탁자위에 엎어놓은 하얀천을 휙 걷어 젖혔다. 순간 섬뜩한 형태의 갖가지 고문기들이 무서울 정도로 와락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나는 두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야. 한마디면 족해.” 내가 조용히 그자를 보며 말했다. “나는 각하의 명을 받고온 사람이야. 지금 자네를 고문하다가 죽어도 병사로 간단히 취급하기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한마디면 족해.”
각하라니 대통령을 말하는구나. 회장님이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갑자기 그 자는 등골을 오싹 전율하게 만드는 난생 처음 보는 고문기 앞에서 삽시간에 온몸을 떨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병사로 간단히 취급한다고 했지? 죽음 앞에서 뼈까지 얼어붙는 공포에 식은땀을 주르르 흘리며 그 자는 인간이 가지는 투쟁의 한계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허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한번만 더 말하겠다. 어디 있어 그 돈?” 내 말에 그자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 저 고문기의 처형을 받고 내가 죽는다면?
“한번 더 말하겠다 어디 있어?” 아, 이틀만 견디면 되는데. 그렇지만 어차피 내가 죽을 바에야. 그 순간 자기 마음을 결심했는지 그자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말했다. “말하겠습니다.” “어디야?” “저의 집 구들목에 숨겨놓았습니다.” “만약 거짓말이면 그냥 골로 갈 줄 알어.” 사람을 보내어 안방 구들장을 팠더니 거기에 정말로 돈뭉치가 나왔다. 검사부장도 자백 받지 못한 사건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이 났다.
그런데 얼마후에 내가 검사부장 앞으로 끌려 나왔다. 검사부장은 나한테 한 수를 배웠는지 정말 고문기를 들이 댈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나는 죄질이 아주 나쁜 어떤 더러운 짓 때문에 옷을 벗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새삼 부끄러운 것은 내가 어줍잖은 형사 나부랭이질 하면서 혼자 너무 까불고 건방을 떨었다는 것이다. 당장 필요한 돈앞에서 머리를 흔들고 필요 없다고 정말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벌써 30년도 지난 그때 사정없이 족치던 나를 보고 허탈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 사람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 꼭 필요해서 빼돌린 그 돈은 재벌한테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그런 돈이지만 어머니가 암으로 입원해있고 이것저것 엄청난 빚 때문에 시달리던 저 사람은 그 험한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왔을까. 지금 저 사람도 흰머리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 나도 그만큼 늙었겠지. 아! 나는 정말 살면서 기차게도 남에게 관용으로 베푼적이 한번도 없었구나.
나보다 한정류장 먼저 내려 지팡이를 짚고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빌듯이 간절히 말했다. “여보시오, 나를 용서하시고 이해해 주시오. 나도 직업을 잘못 택해 그 동안 저지른 더럽고 못된 짓 늙으막에 예수 믿고 모두다 회계한 사람이오. 잠시 소풍 나왔다가 어느땐가 작별인사도 없이 홀연히 하직하는 길에서 여보시오 부디 용서해주시고 혹시 나를 만나면 그저 같이 동행이나 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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