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전도서’에 보면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온다… 그러나 옛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 다음에 오는 세대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란 구절이 나온다. 요즘 대학을 졸업하고 갓 직장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 이 말의 진리가 새삼 느껴진다. 70~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사이먼과 가펑클은 그야말로 팝송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요즘 졸업생들은 이들이 누군지도 모른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이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 백지 상태라는 점이다. YH 사건부터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부마항쟁 등 어떻게 10.26 사태가 발생해 박정희가 암살됐는지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국사가 고등학교 필수 과목에서 제외됐다. 선택인데 그나마 서울대학을 제외하고는 별로 요구하는 데가 없어 학생들이 택하지 않는단다. 괜히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택하는 과목을 들었다가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이다.
역사적 지식도 없는 이들에게 70년대 유신과 80년대 신군부 하에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살벌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힘들다. 툭 하면 대학생과 지식인들을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잡아가 고문하고 집권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한국이 오늘 같이 자유 민주주의를 구가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4.19, 30주년을 맞는 5.18, 그리고 1987년의 민주 항쟁 덕이다. 그 중에서도 1980년 5월 18일 벌어진 소위 ‘광주 사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신군부의 불법적인 권력 장악에 맞서 일어선 광주 학생과 시민들을 전두환 일당은 군대를 풀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민주화 세력은 나라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직선제 개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집권을 통해 다시는 군부 독재가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 집권하고 수조원대의 정치자금을 거둬 측근들에 나눠준 전두환은 잠깐 감옥에 다녀온 후 자신의 죄과에 대한 아무런 사과와 반성도 없이 아직도 주말마다 골프를 치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한국은 참으로 관대한 나라다.
전두환은 그렇다 치고 그 후 집권에 성공한 민주화 세력은 어떻게 됐을까. 오랫동안 ‘빨갱이’ 노이로제에 시달린 이들은 한국을 ‘용공이 미덕이 되는 사회’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 했다. 이 와중에 민주 인사가 ‘빨갱이’로 몰리던 세상은 ‘빨갱이’가 민주 인사 대접을 받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북한에 대한 비판은 한 치도 허용되지 않고 국가의 안보를 책임져야할 국정원까지 친북 인사로 채워졌다. 군부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사람들이 북한 인권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이들이 갖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이를 제대로 보여준 것이 이달로 2주년을 맞는 광우병 촛불 시위다. 취임한지 몇 달 안 되는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FTA를 조속히 시행하겠다는 욕심에 쇠고기 시장을 서둘러 개방했다가 이들로부터 ‘친미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다 죽는다는 유언비어가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가고 일부 방송은 의도적인 오역과 오보로 이를 부채질했다. 날이면 날마다 서울 시내가 촛불로 넘쳐나고 ‘쇠고기 먹고 일찍 죽기 싫다’는 여중생들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한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있지만 죽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그 때 거짓말로 선전선동을 해대던 사람들 가운데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뻔뻔하기로는 전두환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헤겔은 역사는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말했다. 쉽게 풀어 말하면 인간은 한 가지 이상 옳은 일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군부 독재는 인권 탄압을 자행했지만 북한 공산주의 위협은 제대로 봤다. 민주화 세력은 인권 신장에는 기여했지만 북한의 실체를 너무도 모르거나 눈감고 있다. 북한을 바로 아는 민주주의자가 집권하는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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