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는 아이처럼 해맑은데, 시인의 말은 마디마디가 추상같았다. “시와 시인이 너무 많다, 시인들이 장사꾼과 영합해 상업주의에 빠졌다, 이름 있는 시인들조차 영혼을 팔아먹는다, 시 잡지들이 문단을 권력화하고 시인들 줄 세운다, 한국시단은 망했다…” 나태주 시인(65). 등단 40년을 맞아 스물아홉번째 시집 ‘시인들 나라’를 내고 LA를 방문한 원로시인은 ‘시인들 나라’의 썩어서 냄새 나는 한 켠을 아주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질타했다. “이런 얘긴 한국에선 못하지,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 하는 말인데…” 하였지만 오히려 한국에 들리라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옆에서 사모님이 몇차례 눈짓을 보냈지만 “괜찮아 난 이제 늙었으니까”라며 거침없이 쏟아낸 노시인의 쓴 소리는 미주 문단에도 좋은 약이 될 것 같다. 재미수필문학가협회(회장 이정아) 초청으로 방미한 나태주 시인은 오는 13일 오후 6시30분 가든스윗 호텔에서 ‘결핍의 축복에 대하여’ 강연한다.
테크닉만 있는 시인 양산해 독자 외면
그래도 사람이 희망 연애시 쓰고 싶어
13일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초청 강연회
-올해 등단 40년입니까
▲옛날엔 드물었지만 요즘은 등단 50년도 많으니 한국 시단에서는 청소년 그룹입니다. 황동규, 고은 같은 이는 몇 년 전에 등단 50년이 지났고, 김남조 시인은 60년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옛날 시단은 이상 윤동주가 27세에 죽었고, 이장희 김영랑처럼 대개 30~40대에 끝났지만 이제는 60대가 보통이라 등단 40년은 별거 아닙니다.
-시집을 29권이나 냈군요
▲시를 워낙 많이 썼고, 중년기 40~50 사이에 시집을 많이 내서 그렇습니다. 그때 시를 거르지 않고 많이 냈어요. 시는 써진다고 다 쓰고, 썼다고 다 내는게 아닙니다. 충분히 걸러야 해요. 조심하면서 써야하고. 잘못한 것이에요. 시인으로서 감정의 낭비가 심했다고 느낍니다. 나무에게 미안하고… 그럼에도 오늘날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은 그런 낭비와 필요악을 넘어선 결과가 아닐까, 한 사람에게 평화가 찾아오기까지는 많은 필요악과 실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하고 이만큼이라도 좋습니다.
-최근 병상에서 회복됐다고 들었습니다
▲치사율 95%인 범발성 복막염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나 좋은 의술과 시설, 간호, 살겠다는 본인의 의지, 타인의 기도, 그리고 신의 선택으로 인한 기적으로 살아났습니다. 6개월만에 병원에서 나오면서 나는 “기적이 내 몸을 통해 지나갔다”고 말했습니다. 기적이 있고, 신이 있어요.
-시인은 무엇입니까
▲시인 아니면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시인입니다. 시인은 시로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감정이든, 대상이든, 경험이든, 영감이든 그 원재료를 가지고 시로밖에는 쓸 수 없는 사람, 릴케가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을 때 비로소 쓰라’고 했던 것처럼, 그것밖엔 안 된다고 무릎 꿇을 때 나오는 것이 시예요. 시는 함부로 되는 게 아닙니다.
-40년 시를 쓰면서 늘 그처럼 절박했나요
▲내 시 중에도 가짜가 있습니다. 시인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모방이에요. 예수님이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고 했던 말씀, 회칠한 무덤,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죠. 더 나쁜 것은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시와 시인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아요. 산문보다 시 분야가 더 합니다. 시 잡지가 너무 많아요. 중견시인 중에도 시의 본질을 모르고 쓰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시의 본질이 뭔가요
▲영혼의 울림에서 나오는 외마디,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시인들이 감정의 유로를 풀어내는걸 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생과 영혼의 진경을 열려고 노력하지 않고 흥행으로 나가는 거죠. 시인이 장사꾼들과 영합하는 상업주의에 물들었어요. 이름 있는 시인들도 말도 못해요. 스타가 돼가지고 영혼을 팔아먹고, 팔리는 책이나 지향하고, 대중 앞에 스타처럼 나섭니다. 그런 면에선 LA문인들이 오히려 순진합니다. 본래의 순수성을 갖고 있고 떨림이 있으니까요. 한국의 시인들은 떨림과 눈물이 사라졌어요. 테크닉만 남아있죠. 그 결과 독자들이 없습니다. 지금은 독자보다 시인 수가 많은게 한국 시단의 현실이에요. 결론은 자동적으로 시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독자가 없어지니까요.
-해결책이 없습니까
▲현재론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언젠가 좋아질거라는 희망은 있어요. 아예 더 썩든지 더 망해야 됩니다. 그건 한국사회도 마찬가지고. 다 망해서 진흙 속에서 연꽃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도 본질을 잘 지키고 있는 평론가들과 원로들이 있고, 시인이 되고자 열심히 공부하는 순수한 지망생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들에 의해 정리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는 겁니다. 집이 허물어진 후에 다시 짓는 것은 노인들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이니까요.
-그럼 한국 시단은 망한겁니까
▲망한거죠. 소비자보다 생산자가 많으므로 망한겁니다. 한마디로 인플레니까 ‘시 경제’가 망한거에요. 시 잡지가 너무 많아 문단을 권력화하고 시인들 줄 세웁니다. 시 잡지들이 문단의 세력화와 패거리 형성의 도구로 변질됐어요. 그러나 시단은 망했지만 시는 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있어요.
-LA 문인들과 인연이 많습니다
▲2001년 크리스천 문협 20주년 해변문학제에 초청 받은 것을 계기로 몇 번 방문하면서 가까워졌지요. 그런데 한국 고착화된 문인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한국고착화가 무엇입니까
▲이곳에만 있는 한국, 지금 한국에도 없는 한국을 갖고 있는 걸 말합니다. 말하자면 LA문인들은 60년대 한국, 70년대 한국, 80년대 한국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참 애달프기도 하고 답답합니다. 어디에도 없는걸 갖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러지 말고 당신이 서있는 여길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여기가 얼마나 더 현실적이고 드러매틱하고 절실한가 말입니다. “변하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시도 변하는 것이니 변하는 것을 따라가세요. 망하는 한국을 왜 따라합니까. 여기 분들 아픈거 많이 당한 사람들인데, 그 결핍을 쓰세요. 그래서 한국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주는 상이나 받고 하지 말고, 자생적으로 토착화된 시인을 길러내 규율반장 시키십시요.
-앞으로 어떤 시를 더 쓰고 싶습니까
▲연애시를 쓰고 싶어요. 지금도 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떨립니다. 인간은 늙지 않아요. 하드웨어, 껍데기만 늙는 것이고 정신은 안 늙어요.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지요. 또한 인간은 죽어도 죽지 않아요. 몸은 죽어도 영혼이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희망이 있는겁니다. 늙었지만, 망했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겨울은 계절 중에서 망한 계절이지만, 거기서 봄이 오지 않습니까. 그 봄을 잘 쓰고 싶습니다.
<글 정숙희 기자·사진 이은호 기자>
나태주 시인은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63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평생 시와 교단생활을 지키며 살아온 한국 서정시의 대표 시인.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박목월 선생의 눈에 띄어 등단했으며 29권의 시집과 10권의 산문집을 비롯해 5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흙의 문학상, 충남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 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7년 8월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고, 현재 공주문화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시(詩) -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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