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너무 쉽게 버리고 새로 사들이는 소비풍조가 문제인 이 시대에 그 반대인 사람들이 있다. 도무지 버리지를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따금 TV에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도되는 걸 보면 그들의 집은 집이라고 할 수가 없다. 골동품 창고다.
수십년 된 옷이며 신발, 가재도구는 물론, 영수증, 신문, 종이상자, 음료수병, 깡통 등 한번 집안에 들어온 물건은 밖으로 내쳐지는 법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길 가다가도 남이 버린 물건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한다. “언젠가는 요긴하게 쓸 물건인 데, 저 아까운 걸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집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 하나둘 모아들일 때는 사람이 주체이고 물건이 객체이지만 물건의 양이 늘어나면 주객이 전도된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점령군처럼 집안을 차지하면서 집주인은 잠잘 데가 없어 자동차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생각에 이상이 생기면 이런 비극이 가능하다.
종이 한 장이라도 버리면 자기 인생 전체가 내다 버려지는 듯 불안한 이런 증상을 저장강박장애라고 한다. 뇌의 한 부분이 기능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정신질환으로 미국에는 이런 장애자가 200만 명쯤 된다.
하잘 것 없는 물건에 자리를 내어주고 주인인 ‘나’는 쫓겨나는 이런 아이러니는 그런데 강박장애자들만의 문제일까. 부차적인 가치에 마음이 홀려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잃고 마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없는 걸까.
아침 출근길에 수퍼마켓 본스 트럭의 메시지가 눈길을 끌었다. 교통체증으로 차들이 밀린 덕분에 트럭에 쓰인 글귀며 그림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삶을 위한 성분(Ingredients for Life)’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우리 삶에 필요한 성분·재료들을 본스가 공급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트럭 옆에는 ‘L-I-F-E’ 라는 글자와 함께 사진/그림이 실려 있었다.
아이가 비행기를 날리며 즐거워하는 모습, 싱그러운 과일들, 그리고 활짝 웃는 아이의 클로즈업 사진들이었다. 이런 ‘즐거움, 신선한 먹을거리, 사랑하는 가족’이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트럭은 말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즐겁게, 더 잘 먹으며 잘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행복의 추구이다.
이민 연륜이 깊어지면서 70년대 이민가정 자녀들은 40 전후가 되었다. 부모들은 은퇴 연령이 되고 자녀들은 한창 일할 나이가 되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서로 동무처럼 친하게 지낼 시기이다. 그런데 이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앙금이 깊은 가정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첫째는 부모가 일에 너무 매달린 케이스이다. 오랜 자영업에서 은퇴한 한 아버지는 “노후에는 아들과 자주 만나며 가깝게 지내야지!"했다가 아들의 뜨악한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우선 이제는 아들이 너무 바빠서 시간 여유가 없는 데다 “자라면서 아버지와 뭘 같이 해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이 영 어색하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부모가 자녀교육에 너무 강압적이었던 케이스이다. 엄마의 억척스런 교육열 덕분에 명문대학 나오고 전문직에서 잘 나가는 30대의 한 청년은 우울증이 심해서 정신과의사를 만났다고 한다. 의사의 처방은 “3년 동안 엄마와 만나지 말 것”이었다. 성격 여린 아들은 항상 엄마가 시키는 대로 순종했지만 그러자니 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올랐었다고 한다. 해묵은 분노가 가슴에 깊은 응어리로 남아서 우울증이 된 것이었다.
저장강박장애의 문제는 선택능력 상실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우선순위 개념이 없어서 무엇이든 끌어안고 산다. 그것이 물건들이니 불편해도 살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부여잡고 살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을 요구한다.
삶에서 생기는 문제는 대부분 잘못된 선택의 결과이다. 가치의 우선순위에 혼선이 온 결과이다. 일이나 돈, 명예, 학벌 … 모두 중요하지만 부차적이다. 부모, 배우자, 자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 가족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나서야 의미가 있는 가치들이다.
가정의 달 5월은 가치의 우선순위를 점검하는 달로 삼았으면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엉뚱한 것에 주인자리를 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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