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명의 원류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도시가 있다. 아테네와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를 들라면 아테네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우선 시기적으로도 가장 먼저 빛을 발했고 어느 도시보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서양 문명의 토대를 놓았기 때문이다. 로마가 법과 행정, 예루살렘이 종교적인 기여를 했다면 아테네는 철학과 문학, 역사, 정치학, 과학, 수학, 건축, 조각, 음악, 스포츠 등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페르샤 제국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집어삼키고 그리스로 진격해왔을 때 그리스의 군소 도시국가들은 이에 맞섰다.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두 나라의 객관적인 전력이 소련과 룩셈부르크 정도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수십 개 도시 국가 가운데 절반 이상이 페르샤 쪽에 붙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필두로 도시국가들은 마라톤과 살라미스, 플라테아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냈다. 이런 군사적 승리가 없었더라면 자유 시민에 의한 민주 정치도, 자유 토론 속에 싹튼 철학과 과학도 없었고 그리스는 전제군주제 아래서 신음하던 수많은 변방의 하나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황금기는 BC 490년 마라톤 전투부터 BC 399년 소크라테스가 처형됐을 때까지 불과 100년이었다. 페르샤 제국과도 싸워 이긴 아테네가 망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면서 다른 도시국가들이 바친 조공으로 돈이 넘치자 정신적 기강이 무너진 데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재정이 망가진데 있다.
그 후를 이은 로마도 비슷하다. 말로는 1,0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진짜 번영의 시기는 96년부터 180년 네르바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5명의 현명한 황제가 군림한 소위 ‘로마의 평화’ 시대로 100년이 채 안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다섯 명이 모두 입양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전임자가 능력 있는 유망주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 중 하나를 골라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태평성대로 꼽히는 요순시대의 요와 순도 친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세습제의 문제는 그 옛날부터 있었나 보다. ‘5현제’ 중 마지막 인물인 아우렐리우스는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로 평생 진리를 추구했으면서도 왕위는 못난 아들에게 물려줬다 나라를 말아먹고 만다(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당시 상황이 비슷하게나마 그려져 있다). 그 후 로마는 식민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부를 주체하지 못하고 흥청거리다 재정 파탄을 맞는다.
서양에서 로마 다음으로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도 비슷한 길을 간다. 유럽 각국 중 가장 먼저 대서양 항로를 개척해 인도의 고아에서 중국 마카오까지 식민지를 만들고 1494년 토르데시야 조약을 통해 신세계를 스페인과 양분한 포르투갈이나 아즈테크와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아메리카의 부를 독점한 스페인의 영화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며 이 돈을 산업을 일으키는데 쓰는 대신 사치와 향락, 전쟁 비용으로 낭비했기 때문이다.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이들 나라들이 요즘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모두 나라 형편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복지비용으로 재정 파탄이 임박했는데도 아무런 자구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복지 삭감 예기만 나오면 성난 벌 떼처럼 달려드는 이익 집단이 무서워 정치인들이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은 이들 나라 이름의 첫마디를 따 ‘유럽의 돼지들(PIGS)’로 불리는데 일은 안 하고 먹기만 하려드는 점에서 돼지와 닮기는 닮았다. 이들 나라가 연쇄적으로 재정 파탄을 일으킬 경우 유로 존이 흔들리고 간신히 미국발 금융 위기에서 헤어 나오려는 세계 경제는 다시 유럽발 금융 위기에 휩싸일 것이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그 파급 효과는 아이슬란드 화산에 댈 게 아니다. 이들 ‘돼지’ 나라 국민들이 더 늦기 전에 하루속히 제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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