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펜스의 장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를 본 사람들이라면 회사 돈을 훔쳐 달아나던 중 한적한 베이츠 모텔에 투숙한 재넷 리가 샤워를 하다가 습격자에 의해 식칼로 난자당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장면이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만큼 충격적인 이유는 히치콕의 뛰어난 연출력 탓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보는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요인은 버나드 허만(사진)의 음악 때문이다.
마치 한 맺힌 여자 귀신들이 집단으로 분풀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비명을 내지르는데 허만은 청각을 비롯해 인간의 전 감관을 유린하는 이 음악을 현악기만을 사용해 만들었다.
아이로니컬하다 할 것은 히치콕은 처음에 이 샤워 신을 음악 없이 처리하려 했으나 허만의 건의로 음악을 삽입했다는 점이다.
히치콕의 여러 작품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데는 허만의 음악이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특히 귀기 서리고 로맨틱한 ‘현기증’의 음악과 현들이 신경을 자극하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음악은 독립음악으로서도 훌륭한데 만약 이 영화들에 허만의 음악이 동반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영화에 대한 반응도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히치콕과 허만은 ‘해리의 문제’(1955)로부터 시작, 션 코너리가 나온 ‘마니’(1965)에 이르기까지 10여년에 걸쳐 함께 일했다. 이들이 헤어지게 된 이유는 모두 철저한 완벽주의자들인 두 사람의 창조 및 예술적 이견 탓이었다.
허만이 작곡한 또 다른 히치콕의 영화로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와 ‘새들’이 있다. 도리스 데이가 불러 오스카상을 탄 ‘케 세라 세라’로 유명한 ‘나는 비밀을…’의 클라이맥스는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에서 공연되는 토마스 벤자민의 ‘검은 구름’ 칸타타.
이 칸타타를 지휘하는 사람이 허만이다. 그는 히치콕이 자기 영화에 캐미오로 나오듯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내비쳤었다.
허만은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을 비롯해 많은 명감독들을 위해 작곡을 했지만 히치콕의 명콤비로 기억되고 있다. 허만의 비히치콕 음악으로는 ‘제인 에어’ ‘킬리만자로의 눈’ ‘나자와 사자’ 및 ‘케이프 피어’ 등이 있다.
허만은 줄리아드를 나온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오페라 ‘폭풍의 언덕’과 칸타타 ‘모비 딕’을 작곡했다. 그는 일찌감치 전자음악과 악기를 실험한 사람으로 많은 영화음악에서 현악기 위주로 절약적인 음악을 작곡했다.
허만의 유작은 마틴 스코르세지의 ‘택시 운전사’(1976)로 그는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재즈기 짙은 이 음악을 작곡한 직후 사망했다. 스코르세지는 이 영화를 허만에게 헌정했다.
허만 다음으로 히치콕 영화의 음악을 많이 작곡한 사람은 ‘선셋대로’와 ‘젊은이의 양지’ 등의 음악을 작곡한 프란즈 왝스만이다. 그는 히치콕의 할리웃 진출 데뷔작인 ‘레베카’와 ‘의혹’과 ‘이창’ 등의 음악을 작곡했다.
지난 10일 UCLA의 로이스 홀에서 열린 히치콕의 영화음악 오르간 연주회는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제1부에서는 명 오르가니스트인 스티븐 타프가 ‘현기증’과 ‘사이코’ 및 ‘검은 구름’의 발췌부분을 조곡식으로 연주했다.
제2부에서는 역시 명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크리스토프 불이 히치콕이 영국에서 만든 무성영화 ‘숙박인’(1926)의 상영과 함께 자기가 이 영화를 위해 작곡한 음악을 연주했다.
오르간은 플룻에서부터 혼과 트럼핏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기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전음악기라고 하겠다. 타프가 연주하는 ‘현기증’의 로맨스 주제가 농무처럼 마음을 현혹시키더니 이어 오르간은 볼륨 있는 비명을 지르며 ‘사이코’의 샤워 신을 재현했다. 다채로운 음의 변화요 변주였다.
이어 연주된 ‘검은 구름’ 칸타타의 저돌적이자 박력 있는 마지막 부분을 듣고 있으니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에서 허만이 힘차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런던 안개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숙박인’(The Lodger)은 무드 있는 표현주의적 영화로 연쇄살인과 의심과 서스펜스 그리고 삼각관계와 히치콕 특유의 짓궂은 유머가 있는 명작이다. 내용과 기술적인 면에서 모두 뛰어난 작품이다.
옛날 무성영화 시대는 극장에서 피아니스트나 오르가니스트가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즉흥적으로 음악을 연주했다. 불은 연주 전 영화를 몇 번 보고 음악을 작곡했다고 설명했다.
마치 필립 글래스의 음악처럼 음이 반복되는 미니멀리즘 음악으로 전통 오르간 음악에 록과 재즈와 영화음악적 요소를 혼성했는데 영화의 내용과 분위기를 잘 살려주었다. 80분 내내 무대 아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한 불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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