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20년 시카고 명문가의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리노이 생명보험사 설립자였고 아버지는 당시 세계 최대로 꼽힌 객실 3천개짜리 스티븐스 호텔을 직접 지은 소유주였다.
어두운 불행이 덮친 것은 1934년, 대공황의 와중에서 스티븐스 호텔은 파산했고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은 모두 횡령혐의로 기소되었다. 보험사 자금을 호텔 빚 막기에 유용했다는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졌고 삼촌은 자살했으며 홀로 법정에 섰던 아버지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정투쟁 끝에 유죄판결은 주 대법원에서 번복되었다. “한 가족 사업에서 다른 가족 사업으로 자금을 돌리는 것은 횡령에 해당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사기나 은폐한 증거가 전혀 없다”고 대법원은 번복의 근거를 밝혔다.
가족의 비극을 초래한 ‘너무나 부당한 기소와 유죄판결’을 지켜보며 울분을 눌렀던 14세 소년은 그로부터 41년 후 미국 최고의 법정 연방대법원의 판사로 취임했다. 지난 주말 은퇴를 발표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이다.
그의 대법관 35년은 ‘만인에게 평등해야할 법정에 대한 사명감’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많은 경우 성공했고 많은 경우 실패했다. 그러나 그 수없이 많은 케이스를 다루는 동안 단 한 건의 소송에서도 그는, 정부의 직권남용에 의한 불공정한 판결이 보통사람들의 삶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결코 잊지 않았다.
다음 주 90세가 되는 그의 은퇴 발표는 이미 예상되어 온 것으로 충격은 아니었지만 시기 면에선 민주당에도, 또 공화당에도 별로 편안한 타이밍은 아니다. 양당 모두 의회 주도권이 걸린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제’에 포커스를 맞춰 전력투구 중인데, 어쩔 수 없이 당파적 이념대결의 전쟁터가 될 대법관 인준 청문회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어깨가 무거운 것은 백악관도 마찬가지다. 사실 신임 대법관 후보군은 그 어느 때보다 준비된 상태다. 지난해 소니아 소토마요 대법관 지명 때 자격 검증은 물론, 인터뷰까지 마친 후보들도 여럿이니까. 오바마의 상황은 그때보다 못하다. 지지율도 하락했고 전망 어두운 중간선거가 눈앞이다. 후임 대한 요구도 가지가지다. 헬스케어 개혁안 통과로 진을 뺀 상원 민주당 지도부는 인준 무난한 중도성향 인선을 촉구하지만 “선명한 진보 인사를 지명하라”는 좌파의 요구를 외면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여러차례 ‘중도적’ 오바마에게서 배신감을 느낀 리버럴 진영을 또 다시 실망시키기 힘든 형편이기도 하고 보수화된 현 대법원의 이념성향을 중립으로라도 균형 잡으려면 이번에 확실한 진보 판사를 넣지 않으면 안된다.
‘대법원 리버럴의 리더’라는 수식어가 이름의 일부처럼 붙어 다니는 스티븐스이긴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진보적인 법관은 아니었다. 공화당 포드대통령의 지명으로 입성해 임기 전반까지 어퍼머티브 액션의 역차별 소송 바키케이스에서 지지를 표하는 등 보수로 기울었던 그의 성향이 확실하게 바뀐 것은 90년대 중반부터다.
윌리엄 브레넌 등 리버럴의 거성들이 떠나고, 레이건과 부시 시절을 지내며 보수로 기운 대법원에서 그는 뛰어난 지성과 원숙한 경륜, 그리고 겸손한 품성으로 중도파 스윙보터들을 설득해 민권과 평등권을 대변하는 진보의 수장으로 정착해 왔다.
“헌법에 없는 권리를 발명해내고 헌법에 있는 권리를 무시하는 판사”라고 우파는 비난했지만 법 적용에 대한 스티븐스의 신념은 확고했다. 스티븐스의 법정에선 어느 누구도 법위에 군림하지 못했고 아무도 법의 사각지대로 내몰리지 않았다. 대통령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착하고 불쌍한 약자만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 오사마 빈 라덴의 운전사를 지낸 외국인 테러용의자에게도 평등한 법의 적용을 보장했다.
모든 소송에서 ‘정의를 확인시키려는 헌신이 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강조해온 스티븐스는 때로 정치색이 완연한 다수 동료들의 판결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 대선결과에 대한 ‘부시 대 고어’ 소송이었다. 플로리다주 재검표를 중단시키고 부시 손을 들어 준 보수적 대법원의 판결을 그는 소수의견을 통해 강하게 질책했다 : “앞으로도 2000년 대선의 승자는 확실하게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패자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그것은 법치의 불편부당한 수호자여야 할 법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스티븐스 후임 지명의 속전속결을 원하는 백악관은 다음 주 양당 상원지도부와 회의를 갖고 5월 말경 후보를 지명한 후 7월 청문회를 거쳐 8월 여름휴회 전 인준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오바마는 어렵지 않게 또 한명 대법관 입성을 성사시킬 것이다. 리버럴 판사 대신 리버럴 판사가 들어갈 테니 대법원의 이념지형에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십으로 만인에게 평등한 법정 수호에 앞장 서온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의 빈자리를 채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서너달 뜨거운 인준 전쟁의 관전에 들어가기 전, 우리의 평등한 일상을 지켜주고 퇴장하는 노 판사의 신념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박록 /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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