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역사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미국의 대통령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온 말이라고 한다. 역사에 특히 민감했던 대통령은 존 F 케네디였다. 그런 그이기에 연설문에 유난히 신경을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은 남긴 어록으로 종종 기억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 버락 오바마는 이 점에서 분명한 족적을 남겼다. 단지 사상 최초의 흑인대통령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근 한 세기 동안 역대 어느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헬스케어개혁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다.
해외정책에서도 오바마는 그러면 역사에 기억되는 대통령으로 남게 될까.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지난 해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오마바가 밝힌 비전이다. 상당히 파격적 구상이다. 그래서인지 냉소가 뒤따랐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빈정거림이 그 하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상의 세계가 아닌, 냉엄한 현실의 세계’라고 했던가.
그리고 1년 후 오바마는 프라하에서 러시아와 새로운 전략무기감축 조약 조인식을 가졌다. 이번 주부터는 세계 47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핵 안보 정상회담을 워싱턴에서 개최한다. 그리고 이에 앞서 오바마 행정부는 핵태세검토(NPR)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이 획기적이라면 획기적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 약속을 실천하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의지가 구체화 된 대목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미국의 핵무기 사용조건을 스스로 대폭 제한해서다.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해 의무를 준수하는 비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핵보유국이 아닌 나라가 미국이나 동맹국에 대량살상무기인 생화학무기로 공격할 경우 일부 불량국가(rogue state)를 예외로 하고 미국은 핵 응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 수 십 년간 미국의 핵전략은 ‘의도적인 모호성’을 유지해왔다. 도발에 직면했을 때 미국이 언제, 어떻게 핵 응징을 할 것인지 적대국이 알 수 없게 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 목적은 모호성을 유지함으로써 미국이나, 미국의 동맹국을 공격할 경우 상상도 못할 엄청난 핵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공포감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전쟁 억지력’이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통했다. 소련은 미국이나, 미국의 동맹을 침공하지 않았다. 미국은 단 한 번도 핵탄두를 발사한 적도 없다. 지난 60여 년 동안 민주, 공화당을 막론하고 역대 대통령이 준수해온 이 전략을 오바마는 사실상 폐기한 것이다.
왜 그토록 대대적인 수정을 가한 것인가. “다분히 오바마적인 발상의 결과다.” 보수진영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미국이 일종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핵무기 비확산체제를 강화한다는, 어찌 보면 순진한 생각의 발로라는 것이다.
북한이나, 이란 같은 불량국가를 예외로 한 것도 그렇다. 변화된 미국의 핵전략을 공개적으로 알림으로써 이들 불량국가들의 핵 포기를 유도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것이라는 게 오바마 비판자들의 주장이다.
무엇이 핵무기 비확산체제를 강화시키나. 강한 미국, 우방에 대한 확고한 핵 보호를 약속하는 미국이다. 스스로의 핵 응징 포기선언은 불량국가들, 또 심지어 중국 같은 권위주의 형 독재체제에게는 미국의 약점, 허약해진 미국의 유화적 제스처로나 비쳐 진다는 것이다.
현실론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어느 나라도 미국이 아무 이유 없이 핵 공격을 해올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핵 응징의 경우를 사전에 법조문을 나열하다 시피 했다.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진전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핵 응징 포기선언은 유사시 스스로 손발을 묵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핵 태세라는 것은 미국의 우방이나 적에게 분명한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우방에게는 미국의 핵 보호 의지를 분명히 천명하는 것이다. 적에게는 미국의 핵 정책에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흔들릴 때 안보에 위협을 받는 우방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이 들면서 스스로 핵무장을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역사의 위대한 업적은 순진한 이상이 결실을 맺은 결과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점에서 오바마의 ‘핵 없는 세계’ 비전을 한낱 이상으로만 예단할 수는 없다. 더구나 전 세계에서 47개국 정상들이 모여 핵 안보 정상회담이 열린 마당에서는.
그건 그렇고, 앞서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오마바는 해외정책에서도 역사가 기억하는 대통령으로 남게 될까. 그렇게 되기를 기원한다. 그 정책의 성공은 세계평화와 직결되므로.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단어가 스친다. 뭐더라. 그렇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고사성어다. 실속 없이 인의(仁義)만 부르짖다가 대사를 그르친 중국 춘추전국시대 송양공의 고사가 웬일인지 떠올려지는 것이다. 이 역시 부질없는 기우일까, 아니면….
옥세철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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