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적 보수주의’란 말을 기억하는가. 조지 W 부시가 2000년 대선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였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게 그 골자였다.
이 캐치프레이즈가 사사하듯이 취임 초 부시는 감세와 사회적 불평등 해소 등 국내문제를 국정의 최 우선순위로 배정했었다. 9.11사태가 그러나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부시는 해외정책에만 매달리게 되면서 재임 내내 힘의 외교만 지향하게 된다.
우드로우 윌슨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내가 해외문제에 주로 매달려야 한다면 이는 운명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국내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해외문제는 뒷전이다. 그래서 국내문제가 국정의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해외에서 위기가 발생한다. 정책의 운선순위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대통령이 하나 둘이 아니다. 윌슨, W 부시, 클린턴, 카터 등 현대의 미국 대통령은 대부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예외라고 할까, 독특한 처지라고 할까. 오바마 대통령이 맞은 상황은 정반대다. 대선의 캐치프레이즈로 변화를 내걸었었다. 이는 국내 어젠다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해외정책에서의 변화도 강조했던 것. 말하자면 국내정책 못지않은 우선순위를 배정한 게 해외정책이었다.
그 때는 그때.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두 주 전 오바마는 인도네시아, 호주 등 아시아 순방계획을 연기했다. 헬스케어개혁안의 하원통과를 독려하기 위해 주요 해외정책일정을 취소했던 것이다.
국내문제가 화급을 다툰다. 때문에 밖을 내다 볼 경황이 없다. 모든 에너지, 시간,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문제에 쏟아야할 판이다. 헬스케어 개혁안이 그렇다. 지난 1년 간 ‘올인’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간신히 통과시켰다.
헬스케어 개혁 입법화에 성공을 거둔 이제 오바마는 그러면 해외정책에 눈을 돌릴 여유를 찾은 것일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아니 어쩌면 그 개혁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공화당원의 25%는 오바마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있다. 드럿지 리포트에 실린 한 여론조사결과다. 공화당원의 67%는 오바마를 사회주의자로 보고 있고, 또 상당수는 여전히 오바마의 숨겨진 종교는 회교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을 말하나. 오바마의 헬스케어개혁 승리는 하트랜드지역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크리스천 등 오바마 비판세력의 분노를 더 한층 촉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감은 ‘극우’로 분류되는 계층에만 만연한 게 아니다. 중도우파라고 할 수 있는 계층에도 팽배해 있다. 그런 정서를 월스트리트저널의 페기 누난은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
“현대의 고도로 정치화된 민주체제는 바쁜 벌집과 비교될 수 있다. 벌들은 가끔 화가 난다. 벌들은 그렇지 않아도 1년 전부터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악화되는 경제문제로, 신변의 불안 등으로. 그런데 누군가가 커다란 막대기로 쑤셔대고 있는 것이다.”
그 분노감은 여론조사 수치에서도 감지된다. 헬스케어가 하원을 통과한 시점에 실시된 CNN 여론조사는 59%의 미국인이 헬스케어개혁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그 후에 실시된 CBS조사는 헬스케어개혁이 도움 보다는 해가 될 것으로 보는 사람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은 것으로 밝혔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 같은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다수의 의회가 결국 헬스케어개혁안을 통과시킬 것으로 본 미국인이 64%에 이른다는 라스무센 여론조사 결과다. 일반 유권자 정서와 의회의 괴리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헬스케어개혁이 법제화됐다. 그러나 그 법 시행에는 엄청난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벌써부터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폭력 상황도 발생했다. 공화당은 법 폐지운동을 불사하고 있다.
그 되어가는 모양새를 일부에서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의 내전에 준하는 진보와 보수의 문화전쟁이 발발한다는 예고다.
오바마 대통령이 또 다시 바쁘게 생겼다. 또 한 차례 정치적 명운을 걸고 대 국민 설득에 나서야 할 판이다. 원활한 헬스케어 법 시행도 시행이지만 11월 중간선거가 걸려서다.
지금까지의 각급 여론조사는 민주당 열세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정황에 ‘화난 표심’ 설득작업에 실패하는 날이면 그 결과는 아마도 민주당 측으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실종되는 것은 무엇일까. 해외정책이다. “새벽 3시 백악관 비상 전화벨이 울린다. 전쟁에 준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황급히 국가안보회의가 소집되고…” 그런 상황이 오기 전까지 오바마의 해외정책은 표류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옥세철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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