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1964년 미국에 왔을 때 신기한 것 중 하나는 누구나 은행계좌를 열어 수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은행의 당좌계정이란 대회사들 아니면 극소수의 백만장자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풀브라이트 장학생의 한 달 생활비로 국무성 산하의 국제교육기관(IIE)에서 205달러씩 이 수표로 왔었던바 그 수표를 은행에 집어넣어 돌린 다음 한 달에 55달러이던 스탠포드 빌리지 아파트 비를 지불하는 등 수표를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도 발행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는 경험이다.
그때로부터 거의 45년 동안 이 고장 저 고장의 이 은행 저 은행과 거래를 해오는 과정에서 지난주 금요일 처음으로 황당한 사건을 당하게 되었다. 금방 어디를 다녀왔던 아내가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나가길래 웬일인가 했더니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우리 거래 은행에 빨리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3월3일자로 누가 부부 공동명의로 된 우리의 수표 한 장에 6,000달러를 쓰고는 나의 서명을 위조해서 돈을 찾아갔다는 연락이 왔으니까 당장 가서 수표 도난 확인서 등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해야 수습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참 기다려 만난 은행지점 부사장은 아내가 처음 갔을 때 만난 평직원의 말과는 달리 우리 은행계좌 자체를 폐쇄하고 새 계좌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르네 토드란 이름이 수취인이고 내 서명이 어설피 그려져 있는 수표는 이미 M&T은행에서 결제가 되었지만 그 여자나 또는 그 여자의 일당이 우리 계좌번호로 새 수표를 간단히 인쇄해서 더 많은 금융사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란다.
아내가 크레딧 카드도 받지 않는 가게에서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빈 수표 한 장을 운전면허증과 카드들이 든 지갑에 넣고 다녔었던바 어느 가게에서 카드를 쓰다가 떨어뜨렸거나 또는 누가 교묘히 그 수표를 빼앗아갔거나 둘 중의 하나로 생전 처음 신분 도난의 피해자가 되었다.
은행에 제출하는 서류 가운데는 내가 르네 토드란 여자를 전혀 모른다는 내용만이 아니라 나의 서명이 그의 글씨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인지 나의 이름을 열 번이나 서명하라는 부분도 있었다.
은행 자체의 보안부에서 조사를 해야 됨은 물론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된다는 번거로움도 있다. 경찰에 전화를 했더니 경찰관이 우리 집에 찾아올 수도 있고 전화번호를 남기면 담당자가 답전하여 전화로 상세한 내용을 문서로 남기는 방법도 있다기에 경찰차가 집 앞에 서있는 모양새도 이웃들의 눈에 의아심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후자를 택하였다.
전화 담당자는 경찰 신고번호를 주면서 내가 또한 신용조사기관 세 군데에 연락하여 앞으로 90일 동안 나의 이름을 도용하는 사기행위가 있을까 보아 매달 나에게 나의 신용활동 일람표를 보내게 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다행히 한군데 전화를 걸면 세 기관에서 그 정보를 공유한다고 해서 세 군데는 다 전화할 필요가 없었지만 연방 통상위원회(FTC)의 소비자보호센터에는 따로 연락해야 된다고 해서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금요일에 시작된 우리의 작은 악몽이 일주일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우선 은행 보안부의 조사가 끝나야 6,000달러가 풀릴 수 있다. 그리고 3월5일 이전에 발행했던 수표들이 은행으로 가면 우리 계좌가 없어진 상태라 지불이 거절되어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 현상들마저 생긴다.
또 크레딧 카드나 보험회사들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계좌에서 찾아가도록 한 마련도 새 계좌번호를 일일이 알려주어야 지속이 된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연금과 메릴랜드 대학 선생 5년간의 근무 때문에 받는 쥐꼬리만한 연금도 우리 옛 계좌로 자동이체 되기 때문에 그 기관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신분도용을 방지하기 외해 조심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눈뜨고도 코 베어 감을 당하는 기분일 정도로 심기가 불편하다. 빈 수표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사회보장번호, 은행 계좌번호, 크레딧 카드번호 등 모든 재정 상태에 관련된 정보는 철저히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남선우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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