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사촌 여동생이 할리웃에서 영화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할리웃’하면 막연하게 남녀가 평등한 진보적 사회라는 인상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영화계의 유리 천정인 ‘셀룰로이드 천정’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외사촌이 하는 말이다.
“어딜 가든 다 남자예요. 백인남자들 속에 항상 나 혼자 여자예요
그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에게는 두 가지 깊은 잠재의식이 생겼다고 했다. “남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경쟁의식 그리고 가능한 한 자신의 여성성을 감추려는 무의식이다. ‘여성’이 드러나면 차별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분야는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20세기 초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생긴 후 지난 100년 동안 여성의 지위는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그 현주소를 짚어보는 작업이 활발하다. 뉴욕타임스의 국제판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여성 요인’이라는 특집을 연중 기획 시리즈로 내보내고 있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진출의 거대한 산 앞에서 ‘입산금지’ 당하던 때로부터 먼 길을 달려왔다. 교육 분야에서의 변화는 특히 괄목할 만하다. 대학 캠퍼스에서 남학생이 소수계가 된지 오래고 의대나 법대 입학도 여학생이 남학생을 추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행정고시나 외무고시에서 여성이 합격자의 절반을 넘나든다.
그렇다면 이제 남녀는 평등한 걸까. 아마도 여성들이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딸들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다. 하지만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달라진다. 채용, 임금, 승진 등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지난해 국제노동기구가 G20 국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규직 여성과 남성의 임금격차는 평균 20%이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이 1달러 받을 때 여성은 80센트를 받는다. 임금보다 격차가 더 심각한 것은 채용과 승진의 기회이다. 비슷한 조건이면 남성을 선호하는 정서가 사기업에서는 여전히 뿌리 깊다. 한국의 경우 특히 심해서 삼성, 현대, LG, SK 등 4대 기업의 임원 중 여성은 2%가 채 못 된다.
‘여성’이라는 요인을 풀어보면 ‘여성이기 때문에’ 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로 정리될 수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진 제약과 차별을 뛰어넘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회나 지위를 얻기 위해 지난 한세기 여성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어렵게 태어난 ‘여성 1호’들을 징검다리로 여성들은 20세기를 통과했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인 남성들과 경쟁하느라 여전사처럼 전의를 불태우고, 행여 불이익을 당할 까봐 남성보다 더 남성처럼 행동했던 경험들은 보편적이었다.
이제 여성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여성이 ‘여성’으로서 편안한 세상일 것이다.
나의 외사촌은 얼마 전 한 지휘 웍샵에 참가했다. 5명의 백인남성들 속에 또 다시 홍일점으로 들어간 2주간의 프로그램이었다. 웍샵 마지막 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한다. 박진감 넘치는 웅장한 액션영화음악, 서정적인 모차르트 곡 등 몇 개 음악 중에서 한곡을 고르도록 되어 있었다.
사촌은 언제나처럼 가장 남성적인 곡, 액션영화음악을 골라 지휘를 했다.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지휘를 마쳤는데 담당교수가 슬그머니 부르더라는 것이었다.
“잘 했어. 그런데 그 곡은 다른 남자들도 잘 할 수 있는 곡이었어. 네가 이 방의 어느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곡이 있었는데, 그걸 택했더라면 너는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훌륭했을 거야. 네 안에 있는 너를 꺼내도록 해봐
여성적 특성을 살리라는 충고였다. 여성으로서 스스로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이었다.
20세기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 싸운 투쟁의 세기였다. 21세기에는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고유함을 살려주는 상생의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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