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태면 주 코스타리카 대사 전 워싱턴 총영사
어느 날 갑자기 미지의 나라로 발령되어 일을 하는 것이 직업인 외교관에게 낯선 땅은 즐거움이기도 괴로움이기도 하다. 생활환경이 쾌적하다면 행복이겠지만 매우 열악한 나라에서는 커다란 도전이다. 워싱턴의 정든 동포들을 떠나 별안간 코스타리카라는 나라에 온 지도 벌써 1년이다. 제법 바쁘게 살았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일은 없는 나라이다 보니 주로 각계 인사를 교류시키고 우리 기업의 진출을 돕는 일, 대학이나 언론 등에 한국을 알리는 일, 영화나 드라마나 공연 등을 통해 문화를 소개하고 한식을 선보이는 일들로 분주하였다.
코스타리카는 남한의 절반인 영토와 5백만 인구의 작은 나라지만, 쿠데타나 내전으로 얼룩진 중남미에서는 유별나게 민주정부를 백 년 이상 유지해 온 민주주의의 대표주자다. 이에 따라 민주, 평화, 인권에서 중남미 내 미국의 오른 팔과 같은 역할을 해 온 나라다.
지난 해에는 영국의 어떤 연구기관이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1등을 차지하여, 한국의 여러 방송들이 와서 행복 특집들을 만들어 방영했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에서 소득을 빼버리고 평균수명, 자연환경, 생활만족도 만을 기준으로 한 조사였는데, 대체로 한국 분들은 중진국 수준인 이네들이 진짜로 세계에서 최고로 행복한 것인지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런데 지난 1월 초에는 뉴욕타임즈의 논객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아이와 여행을 하고 돌아가 이곳이 행복 1등 국가라는 게 빈 말이 아니라고 칼럼을 써 미국인들의 관심이 더 늘어나고 있다.
이곳에는 가끔 미국이라고 착각할 만큼 미국인들이 많다. 연간 미국인 관광객이 백만 명이고, 은퇴연금으로 사는 미국인 거주자가 십만 명이다. 양쪽 나라에 집을 두고 철새처럼 추운 겨울에만 와서 사는 사람도 많다. 년 중 따뜻한 기후, 화산과 온천이 즐비한 금수강산, 세계 최고의 단위면적당 동식물, 백인 중심의 안정된 사회와 온후한 사람들, 미국 남부와 4시간의 비행거리(북부는 6시간) 등이 이유일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앞으로 이십 년쯤 후에는 코스타리카의 해변이 미국인 이민자로 가득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잠시 즐기고 가는 여행객에게는 천국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현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답답함도 많다. 포장이 안 된 도로를 비롯하여 모든 인프라가 60년대 한국처럼 낙후하고, 도시와 시골 간의 격차나 빈부차가 큰 것은 여느 중남미 국가와 같다. 시골에는 마을마다 움막 같은 교실에서 선생 혼자서 초중고 아이들 모두를 가르치는 1인 교사 학교가 천 개가 넘는다.
작은 정성이나마 한인들과 그런 학교들을 돕는 일이라도 해볼까 하던 차에 지난 연말에는 두 시간 떨어진 바닷가 관광지에 있는 초등학교인 ‘대한민국 학교’(Republic of Korea School) 졸업식에 참석했다. 한인 아이들의 토요학교가 아니라 현지 아이들만 6백 명이 다니는 학교다. 이 나라에는 다른 나라 이름을 붙인 학교가 하나씩 있는데, 최근에는 페루고등학교를 나온 여자 대통령이 당선되어 모교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코스타리카 남쪽 태평양 해변의 유명한 관광지인 마누엘 안토니오 국립공원 부근에 있는 한국학교는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시커먼 건물이다. 동양에서 크게 발전했다는 한국의 이름을 붙이면 무언가 좋은 일이 많지 않겠느냐고 1980년대에 한국학교라고 명명한 모양이다. 우리나라 이름을 단 학교가 하필이면 수도도 아닌 곳에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에 처음에는 창피하고 자존심도 좀 상한 느낌이었는데, 이어지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벽도 없이 양철로 지붕만 얹어 아열대의 소나기가 들이치는 강당에 거의 모든 학생들과 해질 무렵 일을 마친 가족 친지 5백여 명이 빼곡히 들어찼다. 졸업식이 시작되자 학생들이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교장과 함께 60명의 졸업생에게 일일이 뺨을 맞추며 졸업장을 주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는데, 대사로서 폼만 잡았지 아무 것도 도와주지 못하는 심정이 씁쓸하기만 했다. 아직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5백 명의 한인사회도 도울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이 안타까운 모습을 우연히 한국의 신문에 기고했더니 성의껏 돕겠다는 사람들, 와서 보겠다는 분들이 있어 성숙한 한국사회에 감동을 받는 중이다. 페인트칠이 없는 시멘트 벽, 부실한 교실이나 청결치 못한 화장실, 또는 컴퓨터 보급 등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학교 측과 상의 중이다. 가난한 이 시골학교 아이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멋진 이미지를 갖고 자라날 수 있도록 미주 한인들로부터도 따뜻한 손길의 연락이 온다면 더욱 감동스럽겠다.
(참고로 대사관 메일 koco@mofat.go.kr, 개인 메일 tmkwon79@mofat.go.kr) 정들었던 워싱턴의 동포분들께 더욱 건강하고 보람찬 한 해가 되기를 손 모아 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